한홍구 교수가 주춤거리는 ‘정수장학회’ 이슈에 불을 지필 수 있을까. 한국현대사를 전공하고 책 <대한민국사>를 펴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005년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에서 직접 정수장학회 문제를 조사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난 10월 26일 책 <장물바구니>(돌아온산, 18000원)를 내놨다. 

해방 이후 한강 이남에서 제일 부자였던 김지태씨는 1962년 5·16 쿠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분류돼 주식과 토지 10만평을 강압에 의해 기부했으며, 이 재산으로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가 설립됐다.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장물사(史)’를 김지태씨의 일대기를 통해 드러낸다.

한 교수는 이 책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지태씨의 재산 중 지금의 MBC인 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과 부산일보 등 3개 언론사를 강탈한 이유에 주목한다. 이 언론사들은 1960년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를 생중계하고, 마산 앞 바다에서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의 주검 사진을 싣는 등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결정적 타격을 준 공통점이 있다.

한홍구 교수는 이 같은 사실에 주목하며 박정희 정권의 ‘장물바구니’가 언론장악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 MBC주식이 상장됐을 때 정수장학회와 육영재단, 영남학원의 총자산이 10조 원 가량 될 것이란 이유를 들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쉽게 ‘장물’을 포기할 수 없는 배경을 짚었다.

한홍구 교수는 지난 5일 <장물바구니-정수장학회의 진실> 출간기념 북콘서트 자리에서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 문제를 정면 돌파한다고 했는데 정면 돌파하려면 나를 넘어서야 한다. 왜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나”라고 촌평했다. 그는 이 책에서 박 후보가 기자회견에서 제기했던 ‘김지태 부정축재자’ 프레임을 사료를 통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책이 힘을 받기에는 상황이 녹록치 않다. 김용민 <나는 꼼수다> PD는 “정수장학회 사안은 박 후보에게 꽃놀이패였으나 ‘최필립-이진숙’ 대화로 헛발질하고 강탈이 아니라는 박 후보의 발언을 거치며 악재가 됐다”고 지적했지만 논란의 당사자인 MBC를 비롯해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에서 ‘정수장학회 언론사 지분 매각모의’를 ‘도청 의혹’ 프레임으로 돌려놨다.

더욱이 ‘최필립-이진숙 비밀회동’을 단독보도 한 최성진 한겨레 기자가 조만간 검찰에 출두할 것으로 알려져 정수장학회 지분 매각 논의의 본질이 ‘도청’ 공방으로 가려질 가능성이 높다.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는 북 콘서트에서 “최 기자의 검찰 출두로 회사가 어수선한 상황”이라 전했다. 책이 보름만 먼저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집행부 교체를 겪은 전국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 또한 상황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새 노조위원장으로 지난 집행부에서 부위원장을 지낸 서준녕 기자가 당선되며 부산일보 노조의 정수장학회 사회환원 투쟁 기조는 유지될 예정이나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넘지 못해 결선투표를 거치는 등 당선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지난 1년 간 부산일보를 둘러싸고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 투쟁의 가시적 성과는 없고 최필립 이사장은 나간다는 이야기만 무성한 채로 회사의 경영위기가 이어지며 부산일보 내부에서 피로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정호 전 편집국장의 해고로 상징되는 사측의 탄압국면 또한 무시 못 할 상황이다.

때문에 한홍구 교수의 <장물바구니>가 가라앉은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 논의에 다시 불을 지펴주길 바라는 이들이 많다. 김지태씨 유족을 대표하는 5남 김영철씨는 “이 책으로 인해 최근 박 후보가 기자회견서 제시한 허위사실과 누명을 낱낱이 밝힐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김씨는 “정수장학회의 시작은 불법과 강탈이었지만 이 책으로 인해 결말은 정의롭게 났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홍구 교수는 “이 이야기는 50년 전 얘기일 수 있지만 지금 박근혜 후보 측에서 김지태씨가 친일파에 부정축재자라며 피해자를 욕보이고 있다. 이것은 2차 범죄다”라고 지적한 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50년 전의 역사를 통해 2차 범죄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이 이뤄지고 MBC와 부산일보 문제가 해결돼야 정수장학회 문제는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그 전까지는 현실의 문제다”라며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독자 여러분이 써 주셔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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