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시뻘건 불길과 시꺼먼 연기를 보면서 죽어가야만 했던 고인의 고통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번 참변은 우리나라에서 활동보조인의 지원을 받으며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에게는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일입니다.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활동보조 시간에 제한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혼자서 전동휠체어를 탈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었지만 하루 12시간 꼴인 월 363시간만 활동보조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는 하루의 절반만 그가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한 셈입니다. 그나마 고인은 서울시에서 180시간의 시간을 추가로 제공받았기에 사정이 좋은 쪽이었습니다. 월 363시간은 지자체 추가 시간이 아예 없거나 턱없이 적은 지역에 사는 장애인들에게는 입이 벌어질 만큼 많은 시간입니다. 이처럼 현재 우리나라가 제공하는 활동보조의 상한선에 있던 그였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한겨레 기사는 ‘휠체어를 타고 돌아 나오는 얼굴들은 콧물, 눈물, 침으로 범벅이 됐다’, ‘그들은 스스로 손수건을 꺼내 닦아내지 못했다’, ‘어떤 장애인들의 울음은 웃음처럼 보였다’, ‘가사마다 그들의 발음은 갈라져 흔들렸다’라고 장례식에 참석한 장애인들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영상운동단체 다큐인에서 상근자로 활동하고 RTV에서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미디어운동도 했던 고인이 그 기사를 보았다면 실망 혹은 분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장애가 적나라하게 묘사당할 때 장애인이 느끼는 불편한 마음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비장애인 독자만을 염두에 두고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기사를 읽고 불편한 마음을 전한 장애인들이 몇 분 있었습니다. 오열했는데 웃음처럼 보였다니요?
물론 비장애인에 비해 장애인의 몸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묘사하는 것은 비장애인이 다수인 사회에서 여론 형성에 당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장애가 있는 몸의 특성이 부각되면 그만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거리는 멀어지게 되고 결국 그 시선은 시혜와 동정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시혜와 동정의 파국적인 결과는 고인과 같은 죽음입니다.
1급 아닌 장애인에게도 활동보조가 필요하다는 것은 복지부의 장애인실태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정부는 예산은 한정되어 있기에 장애가 더 중한 사람에게 우선 서비스를 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불쌍하니 조금 주긴 주는데, 그것도 내가 보기에 더 불쌍한 놈에게 주겠다’라는 시혜와 동정의 관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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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국가에서는 법정 용어로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지도, 장애인만을 위한 법도 만들지 않습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는 보편적 복지를 위한 틀 안에서 제공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또렷하게 구분할 때 생기는 차별과 낙인에 대한 감수성이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그래서 같은 날 한겨레 2면에 실린 <“김씨가 죽을 이유가 없어요”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이라는 기사가 고인의 죽음을 더 애통하게 합니다. 고인은 한국에서 태어나 장애인이 되었고,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다섯 걸음이면 벗어날 수 있던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2010년 9월 장애인활동보조살리기 노숙농성 때 고 김주영 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장애등급재심사로 많은 장애인들이 장애등급이 하락해 받고 있던 활동보조가 끊기는 일이 속출하던 시기였습니다. 고인도 장애등급재심사를 받아 장애등급이 하락하면 활동보조가 끊길까봐 두려움에 떨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이어 고인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주류 언론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소수자의 문제는 소수자의 관점에서 보도해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