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교수는 강의실을 떠났다. 2008년 6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는 “여전히 좋은 정당과 좋은 정치 리더의 출현을 고대한다”며 고별강연을 마쳤다. 4년이 흘러, 칠순을 맞은 노교수는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칠순을 맞은 정치학자가 불안정 노동현장을 누비며 기록한 ‘현장보고서’다. 

최장집 교수는 새벽 인력시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를 만났다. 여전히 ‘시다의 꿈’이 떠도는 장위동 봉제공장을 찾았고, 울산에선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취재했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이주노동자, 재래시장 상인, 청년 비정규직, 신용불량자 등 한국 사회 ‘하층 피지배계급’의 삶을 목격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아무리 남의 삶이라도 결핍과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은 정신적으로 괴로운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평생 민주주의와 노동을 연구한 노학자는 차분하게 현장을 분석한다. 우리들의 삶의 위기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흡사 19세기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한국판을 읽는 느낌이다.

저자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와의 만남을 두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날마다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불안정성의 문제가 있다. 전국 안 가는 곳이 없고, 현장에 도달하는데 보통 서너 시간 이상 걸리기에, 정상적인 가정생활은 물론 여가를 갖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문장 하나하나에선 학자 이전의 인간적 연민이 느껴진다. 

저자는 “새벽의 인력시장에서 정치와 정당의 부재는 물론이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진보 정당의 부재 역시 실감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정치권과 시민사회, 여러 운동단체에서 내세웠던 화려하고 추상적인 진보적 구호와 담론들이 현장에서는 아무 흔적도 갖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상황이 현장 없는 ‘엘리트 중심’ 학생운동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를 바라보며 “카프카의 소설(<변신>)속 소외된 한 인간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전했다. 이 비정규직 노동자는 “10년 가까이 현대차에서 일했는데, 그 사이 자기를 고용한 인력회사가 일곱 번 바뀌어 계약서를 고쳐 쓰며 ‘내가 지금 회사에 다니는 건가’ 자문하게 됐다”고 말했다.

장위동 봉제공장에서의 기록도 인상적이다. “약 1만5천 명 정도가 이 근방에서 일한다. 봉제 공장 노동자 구성은 저임금 생산직 노동시장구조의 박물관 같았다.…이 지역에서 정당은 보이지 않는다. 선거철을 제외하고는 평상시에 정치인이 공장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곳은 한국 민주주의의 결핍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의 힘이 빈약한 상황에서 노동자의 삶은 불행했다. 저자는 대형마트가 들어선 이후 침체된 공덕동 재래시장을 찾아가고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을 만나 세대 노조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는 “청년유니온의 발전은 민주주의에서 대표의 직접성을 확대하고 정당으로 하여금 공약에 대해 책임성을 갖게 한다”고 내다봤다.

현장을 다녀온 학자의 결론은 전과 같이 뚜렷했다. “민주주의가 일반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없다면, 사회적 불만이 확대되는 것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기반도 약해질 것이다.” 여전히 탐구와 성찰을 멈추지 않는 노학자의 모습은 후배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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