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현병철)와 한국기자협회(회장 박종률)가 1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성범죄 보도 세부기준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한 교수, 언론인, 시민단체는 지난 8월 나주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를 ‘선정’, ‘자극’, ‘인권 침해’로 평가했다.

지난 8월 말 시작된 언론보도를 복기해보자. 언론은 가해행위를 자세히 묘사하기도 했고, 피해자의 거주지를 특정하기도 했다. 가해자의 얼굴과 이름이 공개하지 않은 곳은 경향신문과 한겨레, 그리고 KBS뿐이다. 성범죄의 근본적 원인은 짚어내지 못하면서 기사를 양산해 내는데 급급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모니터링을 통한 언론보도 비판은 급증하는 성범죄 보도 배경에는 이명박 정부의 ‘존재감 과시’가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리고 최근 경향신문이 제정한 보도준칙이 소개됐다.

발제자인 조호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는 나주 사건을 거론하며 본질과 상관없는 보도로 2차 피해가 발생했다고 평가했다. 조 에디터는 “언론보도가 과열 경쟁으로 인해 흥미 위주, 선정적으로 흐르면서 사회적 논란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그는 피해자의 거주지 주변 위성사진, 일기 등 개인기록물을 게재한 언론, 범죄 행태를 자세히 묘사하고 피해 상황을 생중계하듯 보도한 언론에 대해 “보도의 공익이나 헌법상의 알권리와 거리가 있고, 피해자와 그 가족의 2차 피해 우려를 도외시한 보도”라고 비판했다.

대다수 언론이 피해자의 피해 상황을 상세히 묘사한 바 있다. 동아일보 종합편성채널 채널A는 9월 1일 리포트에서 피해자의 상처부위 사진을 공개했다. 채널A는 이어 피해자의 집 내부를 촬영해 내보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범행을 재구성하는 그래픽을 게재하면서 피해자의 집을 특정했다(9월 1일). 경향신문은 피해자의 일기를 단독보도하기도 했다(같은 날 1면). 성범죄의 원인을 게임과 포르노로 몰아가는 보도도 많았다.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가 지난 8월 31일부터 일주일 동안 지상파 3사의 메인뉴스와 종합일간지 10개를 대상으로 한 모니터 결과를 보면 이 같은 문제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모니터 대상: 경향신문 국민일보 내일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등 10개 신문, KBS1 ‘9시 뉴스’ MBC ‘뉴스데스크’ SBS ‘8시 뉴스’ 등 방송 3사 메인뉴스 프로그램)

‘아동 성폭력 사건 보도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10개 신문은 평균 30건에 가까운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내일신문이 12건으로 가장 적었고, 서울신문이 41건으로 가장 많았다. 30건 이상 기사를 내보낸 신문사는 경향, 조선, 중앙이었다. 방송은 KBS 18건, MBC 27건, SBS 16건으로 총 61건이다.

이중 민우회가 제정한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난 보도는 신문 167건, 방송 39건으로 절반이 넘었다. 이중 ‘성폭력 사건을 선정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꺼리로 다루거나 피해의 내용을 자세히 묘사해 선정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가이드라인에 어긋나는 보도가 신문과 방송 각각 60건, 19건으로 가장 많았다. 민우회는 방송보다 신문에서 선정적 보도, 인권 침해보도가 두드러졌다고 평가했다.

민우회는 언론이 △검증되지 않은 대책을 나열했고(신문 19건·방송 4건) △피해자 및 피해가족 유발론을 강화하거나(신문 16건·방송 4건) △가해자의 변명을 여과 없이 보도(신문 12건·방송 4건)한 것으로 파악했다.

문제는 내용이다. 민우회는 동아일보 9월 1일자 <애들은 잘 있죠? 범행 직전 PC방서 아이엄마에게 물어봐> 기사, 중앙일보의 <범인, 몹쓸 짓 뒤 여아 태풍 속 방치하고 찜질방서 잠> 제하 기사에 대해 “마치 한편의 소설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면서 “이는 성폭행 사건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전락시켜 사건을 범죄가 아닌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민우회는 “신문과 방송 모두 사건 내용과 피해상황을 글과 그림, 영상으로 상사하게 보도해 피해자의 2파 피해를 유발했으며 경쟁적인 피해자와 그 가족의 사생활 보도로 인권을 침해했다”고 지적했다. 민우회는 이어 “언론은 우리사회에 만연하는 성폭력 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해서라도 보다 본질적인 접근으로 성폭력 사건을 보도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조호연 경향신문 사회에디터는 이날 경향신문의 성범죄보도준칙을 소개했다. 이 준칙은 나주 사건 보도 이후 편집국장과 사회에디터, 사회·전국부장, 평기자 등이 참여하는 긴급 편집제작평의회를 열어 제정했다. 피해자 및 주변인의 인권, 가해자의 인권, 가해자중심적·선정적 보도 지양 등이 준칙의 원칙이다.

준칙에 따르면, 경향신문은 △피해자의 얼굴·이름·주소지·학교·직장 등 신상정보와 사적기록물을 공개하지 않고(공익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될 때는 보도할 수 있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 등 주변인물에게 2차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의 삶을 가부장적 성문화의 시각으로 재단하지 않고 남성중심적, 가해자중심적 용어나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경향신문은 △경찰 및 검찰 등 수사기관이 제공하는 정보에 있어 보도 적절성을 판단하고, △가해수법과 피해사실 등에 대한 지나친 묘사와 자극적인 제목 등 선정적인 접근을 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것도 포함됐다. 특히 경향신문은 아동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부모나 대리인이 제공하는 정보라도 피해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는 조항을 뒀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는 성폭력 보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도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인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07년 연간 100건에서 200건 사이였던 성폭력 관련 보도는 이명박 정부 들어 2008년 402건, 2009년 624건, 2010년 1073건으로 증가했다.

양현아 교수는 “한국에 객관적으로 성폭력이 증가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면서 “설령 증가됐다고 해도 그것이 몇 배나 증가했다고 볼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성폭력 보도가 성폭력 사건 및 신고율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양 교수는 2008년 ‘김길태 검거’를 앞두고 “이 사건에 전략투구하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지시 및 정부의 과잉관심과 존재감의 과시를 성폭력 보도 증가 배경으로 지목했다.

양현아 교수는 민우회, 한국기자협회 준칙이 있는데도 자극적인 방식으로 보도하는 언론에 대해 “기자와 실무자들이 진정 성폭력범죄의 성질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며 기본적인 성인지 의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경향신문의 성범죄보도준칙이다.

-피해자의 얼굴·이름·주소지·학교·직장 등 신상정보와 사적기록물을 공개하지 않는다. 다만, 피해자의 기록물 등이 공익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될 때에는 보도할 수 있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 등 주변인물에게 2차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한다.

-취재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삶을 가부장적 성문화의 시각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경찰 및 검찰 등 수사기관에서 제공하는 정보도 보도의 적절성을 판단한다.

-가해수법과 피해사실 등에 대한 지나친 묘사와 자극적인 제목 등 선정적인 접근을 하지 않는다.

-남성중심적, 가해자중심적인 용어나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범죄 원인을 분석할 때 가해자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도 고려한다.

-가해자의 얼굴, 이름 등 신상정보를 원칙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가족 등 주변인물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아동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부모나 대리인이 제공하는 정보라도 피해 아동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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