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 내륙에 억류중인 한국 선원들이 10월 10일로 피랍 530일을 맞았다. 지난 8일 피랍선원 가족들은 처음으로 언론 앞에 나서며 눈물로 구출을 호소했다. 제미니호 장기피랍의 과정과 원인, 해결방안을 정리했다.

■ 530일, 피랍에서 가족들 오열까지 = 아프리카 케냐 몸바사항으로 이동하던 화물선 MT제미니호가 2011년 4월 30일 케냐 인근 해역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다. 해적들은 ‘납치 비즈니스’가 예년만큼 신통치 않아 한 번 납치하면 최대한 몸값을 올려 받고 있다. 제미니호 선원은 모두 25명. 이 가운데 박현열 선장을 비롯한 한국 선원이 4명이었다.

제미니호 선박을 소유한 싱가포르 국적 선사 ‘글로리 쉽’은 해적과 협상에 나섰다. 그 해 11월 30일 선사는 협상금을 주고 배와 선원들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한국 선원들만 풀려나지 않았다. 이후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단을 비롯한 다수 언론은 외교부의 보도유예(엠바고) 요청에 따라 지난 12월 초부터 올해 9월 중순까지 9개월 간 제미니호 관련 보도를 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협상에 불리해진다”는 정부와 선사의 요구에 따라 500일 넘게 언론대응을 자제해왔으며, 심지어는 일가친척에게도 피랍사실을 숨기며 지내왔다. 하지만 피랍 선원이 현지에서 겪고 있는 고통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전해졌다. 가족들은 “정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고 토로했다.

지난 5월 초 싱가포르 선사는 한국을 방문해 해적들이 아덴만 사건 때 죽은 8명의 몸값과 생포되어 있는 5명의 해적에 대한 보상금을 계속 제기하는 한 협상의 진도를 나갈 수 없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협상권이 없을뿐더러 해적과는 협상에 응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협상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500일이 지났다.

지난 8월 23일 미디어오늘과 시사인의 보도를 시작으로 사건은 공론화됐다. 지난 9월 12일 KBS <추적60분>이 방송되고 CBS <김미화의 여러분>도 사건을 알렸다. 다수 언론은 피랍 500일을 맞아 일제히 보도에 나섰으나 추가 취재기사는 없었다. 결국 추석연휴가 지나자 가족들이 결심하고 지난 8일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 최장기피랍, 아덴만 작전에서 비롯…가족들 “마음아파 견딜 수 없어” = 제미니호 최장기 피랍사태는 2011년 1월 이명박 정부가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했던 ‘아덴만의 여명 작전’(아덴만 작전)에서 예견된 일이었다. 당시 정부는 해적에게 억류된 삼호 주얼리호와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청해부대를 파견, 선상에서 전투 끝에 해적을 소탕했다.

청해부대는 8명의 해적을 사살하고 5명의 해적을 붙잡아 한국으로 송환했다. 해적들은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고 한국의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하지만 해적에 대한 무력진압은 역으로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한국에 대한 반감과 보복의지를 크게 불러일으켰다. 아덴만 작전 이후 두 달여 만에 제미니호 선원을 잡은 해적들 입장에선 곱게 풀어줄 리가 없었다.

케냐 현지에서 소말리아 해적과 여러 차례 협상을 중재한 김종규씨에 따르면 해적들은 제미니호 납치 후 얼마 되지 않아 한국군에 생포된 해적의 가족에게 한국선원들을 넘겼다. 지난해 말 대다수의 한국 언론이 “해적들이 인질맞교환을 원한다”고 보도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였다.

현재 해적들은 수개월이 지나며 인질맞교환을 포기하고 아덴만 작전으로 사망한 해적 8명과 한국에 붙잡혀 있는 해적 5명에 대한 거액의 몸값을 추가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험금을 이용해 이미 배와 대부분의 선원을 돌려받은 싱가포르 선사 입장에서는 이런 협상이 달가울 리 없다.

그래서 결국 가족들이 나섰다. 제미니호 가족대책위는 8일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고 정부와 국제사회의 대응을 호소했다. 이들은 “언론보도는 협상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정부와 선사 쪽) 이야기 때문에 언론에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왔지만 500일 동안 협상에 아무런 변화도 진전도 없었다”며 언론에 나서게 된 배경을 밝혔다.

가족들은 이대로는 남편과 아버지, 아들을 구출할 수 없다는 위기감과 함께 이명박 정부에게 이 사태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날 피랍된 박 아무개 선장의 여동생 박 모씨는 “지금까지 고통 속에서 인내해왔지만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어 이 자리에 앉았다”고 밝힌 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님, 이명박 대통령님, (선원들이) 살고 싶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발 도와주십쇼”라며 흐느꼈다.

■ 정부와 언론이 나서지 않으면 해결 어렵다 = 아덴만 작전은 제미니호 협상 난항의 직접적 변수다. 따라서 해적과 협상을 이루려면 당시 군사작전의 주체였던 한국정부가 어떻게든 나서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해적과 협상주체는 싱가포르 선사이지만, 협상을 어렵게 만든 ‘변수’는 한국정부가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에 사정이 밝은 인사들은 선원들의 빠른 석방을 위해선 △싱가포르 정부를 압박해 선사를 움직이는 방법 △최근 집권한 친미성향의 소말리아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는 방법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방안은 모두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전제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곳은 결국 언론이다.


하지만 언론은 여전히 제미니호 사태 보도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8일 기자회견도 대다수 종합일간지는 9일자 지면에서 사진기사로 대체했다. 다수 언론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선원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보도유예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바 있다. 보도자료와 출입처에 의존한 기자들의 받아쓰기 관행은 지금도 외교부를 벗어난 취재를 어렵게 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한편 기자회견이 있었던 8일 저녁 7시 경 피랍선원 전원이 가족들과 통화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피랍 가족 대표인 강인용씨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선원들은 모두 건강하다고 밝혔으며 궁금한 것이 많아 가족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고 밝혔다. 가족에게 걸려온 전화는 지난 7월 이후 3개월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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