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원 4명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지 500일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말리아 현지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자국민을 구출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한국 외교통상부는 선원들이 재차 납치됐던 지난해 말 언론 보도 이후 외교부 출입 기자들에게 9개월 째 보도유예를 요구했으며 기자들은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해외에 근무하다 납치된 자국민의 무사귀환을 위해 정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로 9개월이 흐른 것이다.

싱가포르 화물선박 ‘제미니호’(MT GEMINI)에 승선했던 박현열 선장(57)과 이건일, 김형언, 이상훈 선원 등 4명의 한국인을 포함한 25명 선원은 2011년 4월 30일 인도네시아에서 케냐의 몸바사 항으로 항해하던 중 아프리카 인근 해적 위험해역에서 납치됐다. 2011년 12월 1일 싱가포르 선박회사 ‘글로리쉽’은 해적과 협상을 통해 선원들을 돌려받았지만 인도네시아와 미얀마, 중국 국적 선원 21명뿐이었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한국인 선원 4명만 다시 육지에서 납치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당시 대부분의 언론에 보도됐다.

SBS를 비롯한 당시 언론보도는 “삼호주얼리호 구출작전(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생포된 소말리아 해적 5명이 한국에서 재판 중인데 소말리아 해적들은 이들의 석방을 공개적으로 요구해왔다”며 “(해적들이) 맞교환을 염두에 둔 협상을 하며 한국인 선원들의 위험성을 부각시켜 협상금을 더 받으려는 전략”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외교부는 한국인 선원이 풀려나도록 선박회사와 긴밀히 공조하겠지만 정부가 직접 해적과 협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그 이후 무려 9개월(482일)이 지난 23일 현재까지 제미니호 선원들의 생사여부나 협상 상황 등에 대해서는 우리 언론에 한 차례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외교부가 출입기자단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요구한 보도유예를 기자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외교부 출입기자단 간사를 맡고 있는 김기수 내일신문 기자는 23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놓고 딜레마가 있지만 해적들이 언론에 내용을 흘려 기사를 쓰게 만들고 협상 단가를 올리기 때문에 보도를 자제하는 경우가 많다”며 “(현 상황에) 문제의식은 있으나 계속된 해적과의 악순환 때문에 (보도유예를) 받아들인 것”이라 밝혔다. 김 간사는 “무엇보다 기사 쓰는 것을 가족들이 말리고 있고 보도 이후 단가가 높아지기 시작하면 아덴만과 같은 무리한 작전이 나오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TV조선과 채널A 등 종편과 몇 몇 언론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산발적으로 취재했으나 외교부의 공식요청으로 보도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보도유예 요청을 한 이유에 대해 “보도 나가면 해적들 입장만 강화시켜준다”며 “또 납치된 선원의 가족들이 비(非)보도를 강하게 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태영 대변인은 “해적들이 유리한 금액협상을 위해 한국 주요일간지에도 전화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에 반해 우리 선원을 납치한 소말리아 해적들은 정부와 직접 협상을 원하기 때문에 선박회사를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 현지 매체인 ‘소말리아 리포트(www.somaliareport.com)’는 지난 1월 23일자 온라인판 기사에서 “해적들이 선원 4명에게 총 400만 달러(약 45억 원)의 몸값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소말리아 리포트’는 해적들이 4명의 선원 중 2명이 몹시 아프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있다면 보살필 것이지만 우리의 안전을 위해 의사를 데려올 수는 없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이들이 갇혀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소말리아 지역은 더운 날씨에 염분이 높은 물에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까지 있어 외국인의 장기체류가 무척 어려운 곳이다.

선원들의 안전 문제에 대해 안영집 외교통상부 재외동포영사국장은 지난 22일 “선박회사가 협상전문가를 고용했으며 (납치된) 선장과 선원들은 괜찮다고 한다. 선원들은 가족들과도 통화하고 있다”며 “정부도 절실하지만 해적과 경험했던 과거의 학습효과에 따라 안달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우리도 인내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납치된 박 선장의 가족인 박아무개씨도 23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며칠 전 (가족과) 통화는 했다. 현재 달리 뭐 방법이 있겠나. 그냥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라고 밝혔다. 박씨는 납치 선원 가족들을 취재한 KBS <추적 60분> 제작진에 대해 “마음은 고맙지만 방송이 나가는 것이 유익하겠나”라며 “외교부가 긴밀하게 하는 것들이 지연될 수도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협상과정에 대해서도 외교부가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현지의 사정은 불안정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소말리아 리포트’는 지난 4월 23일 온라인 판에서 소말리아 내 위치한 하라데레(Harardere) 지역에서 해적들끼리 한국 선원들을 서로 차지하려다 내분이 일어나 총격전으로 약 10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희생자 중에는 납치 선원들을 관리하던 해적도 포함됐다고 전했다.

또한 ‘해적과의 협상은 없다’며 소말리아 등 해적들의 한국인 납치에 단호한 입장을 견지해온 우리 정부의 이번 사건에 대한 태도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1월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 주얼리호’ 선원 구출을 위해 이른바 ‘아덴만의 여명’이라는 군사작전으로 해적을 진압한 뒤 이들을 구출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대통령의 치적으로 삼기도 했다. 이에 반해 이 사건 이후 3개월 뒤 벌어진 똑같은 해적 납치사건에 대해 우리 정부는 1년 4개월 째 아무런 결론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출신인 김재명 성공회대 교수(교양학부)는 23일 “만약 외교부가 방치하고 있었다면 정말 큰 문제다. 지금껏 이명박 정부가 외교에서 헛발질을 많이 해온 터라 정부가 최고로 노력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며 “현재 외교부에 협상을 위한 TF(태스크포스)팀이 있는지, 아프리카 외교에 강한 중국 등 제 3국의 도움을 받고 있는지 등 협상 상황이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보도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최근 아프리카 현지를 다녀온 <추적 60분>팀의 강윤기 PD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방송할 예정”이라며 “방송 시기는 여러 이유로 조율 중에 있다”고 밝혔다. 현재 외교부는 <추적60분>에도 다른 언론사와 마찬가지로 보도유예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번 납치사건은 삼호 드림호(피랍 217일 만에 석방) 이후 소말리아 해적에 의한 최장기 납치사태로 기록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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