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연쇄살인범을 쫓는 영화 <살인의 추억>과 할리우드 판 <조디악>의 차이점이 있다면 ‘기자’의 존재감이다. 박두만(송강호 분), 서태윤(김상경 분) 역할을 하는 형사가 나오지만 사건의 주된 실마리를 풀어가는 또 하나의 축은 한 신문사 기자와 만평가다.

영화 <조디악>은 살인마가 샌프란시스코의 3대 신문사에 편지를 배달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등 처음부터 살인마와 언론과의 대결 구도를 상정하고 있다. 이들이 악을 응징하고 실체를 밝히는 역학을 부여받는 반면 <살인의 추억> 속 기자들은 살인 사건 현장을 이리저리 살피는 엑스트라로 출연해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나타내는 배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기자들은 사건 현장에서 주요 권력자들의 말에 따라 휩쓸리는 존재이거나 배우 최지우씨가 잡지사 기자로 나오는 <키스할까요>나 방송국 기자들의 애환을 다룬 <스포트라이트>에서처럼 다소 낭만적인 전문직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이는 한국사회의 언론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언제 우리 언론들이 수동적인 존재이기만 했던가. 어느덧 제4부 권력으로 성장한 언론은 권력과의 유착을 통해 진실을 알리기보다는 이를 비틀고 이 과정을 통해 기득권층이 권력을 유지하는 일종의 ‘부당거래’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화제 속에 종영된 드라마 <추적자>는 이러한 언론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끄집어냈다. 한오그룹 서 회장의 딸 지수는 몇몇 마이너 매체들의 기사 정도는 못 나오게 막을 수 있고 아들 영욱은 극중에서 유력한 지상파 방송국 데스크를 움직여 자신의 동생인 사회부 기자 지원의 기사를 수차례 통제한다.

특히 “한오그룹 경제연구소에 전화해서 내년 경제 성장률을 몇 퍼센트 떨어뜨려서 신문에 내라”는 서 회장의 한 마디는 자본에 종속된 한국의 언론 현실을 반영한다. 최영일 문화평론가는 24일 통화에서 “이 드라마의 시나리오가 담고 있는 모델은 국가, 검찰, 기업, 언론 등 조직화된 강자와 형사, 검사, 기자, 깡패 등 조직되지 못한 약자와의 대립구조”라며 “이 속에서 언론은 대중들의 의식이나 팩트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세력으로 등장한다”고 지적했다.

이 드라마에서 절대악으로 등장하는 강동윤과 언론의 관계는 정언유착 그 자체다. 신 회장은 “강동윤은 대통령이 되면 맨 먼저 언론부터 잡으려 할 거다. 자기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는 아들이 필요할 것 아니냐”고 말한다. 강동윤은 “퇴임하고 나면 언론이고 검찰이고 승냥이 떼처럼 몰려들어 물어뜯는 그런 자리, 청와대 정거장이다”며 “내 꿈은 고작 5년이 아니라 50년, 아니 평생 동안 어느 누구도 고개 숙이지 않는 자리(한오그룹 회장), 그게 내 꿈이다”고 말했다. 신 회장과 강동윤의 대사는 최고 정치권력 앞에는 ‘애완견(Pet Dog)’이 되지만 끈 떨어진 권력 앞에서는 돌연 ‘감시견(Watch Dog)’으로 변하는 언론을 간접적으로 꼬집고 있다.

기자 혹은 언론인이 미디어에서 기회주의적이고 심지어 악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60~70년대부터 ‘진실을 쫓는’ 기자를 영화 전면에 종종 등장시켰다. 예컨대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살바도르>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기자는 처음에는 공명심으로 취재를 시작하나 남미 엘살바도르의 학살 현장을 보고는 ‘진정한’ 펜을 들게 된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의로운 기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최 평론가는 “대중 다수가 기성 미디어들을 썩 믿지 않는다는 심리가 반영된 것 아니겠느냐”며 “기자들이 억울한 이와 진실의 편에서 보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는데 이것이 소극적으로 표현될 때는 기자를 엑스트라나 소품처럼 배치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반영할 때는 대중의 편에서 권력과 맞서는 모습으로 표출된다”고 바라봤다.

그렇다면 <추적자>에 등장하는 사회부 기자 서지원의 등장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서지원은 언니와 형부 등 자신의 가족이 관련된 추악한 범죄 앞에서 “재벌집 막내딸이 되든, 사회부 기자가 되든. 기사를 쓰든, 집에 가서 대책회의를 하든”이라는 검사 최정우의 말에 기자로서의 길을 택한다. 또 다른 드라마 <유령>에서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인터넷언론인 트루스토리 여기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미디어 속 기존 기자상에서 진일보한 것일까. 수동적이거나 악의 편에 서 있는 기존의 기자와는 다르지만 정의로운 언론이 등장했다고 보기엔 회의적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최지은 텐아시아 기자는 “재벌가의 딸이 사회의식이 있는 방송사 기자로 나온다는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인데 다만 ‘당신이 진실을 밝히고자 했을 때 안락한 환경이 무너지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며 “일부 기자들이 광고수익을 통해 높은 연봉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이 생활인으로서의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최 평론가는 “<추적자> 속 주연급 조연들이 진실을 배포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언론은 썩었다, 그럼에도 소수 언론인들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는 점에서 이의가 있다”면서도 “결국 서영욱의 도움으로 진실을 보도할 수 있는 모습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고 바라봤다.

하지만 현실에서든 미디어에서든 정의로운 언론인의 출현을 바라는 사회적 요구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MBC 과 주진우 시사인 기자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와 열광이 이를 보여준다. 최 기자는 “주진우 기자에 대해 굉장히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이상형이라고 느꼈던 기자상에 근접했기 때문”이라며 “이제껏 기자는 언론사의 직원이지 진실을 위해 맞서 싸우는 사람으로는 안 보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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