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두고 삼성과 CJ가 물밑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CJ가 개정안 통과에 그룹의 사활을 걸고 덤비는 가운데 삼성이 개정안 저지에 나섰다. 삼성은 이 개정안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지만 최근 상속재산 반환 소송의 보복 성격이 강하다는 게 업계 관측이다. 문제의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은 유선방송 사업자(SO)와 채널 사업자(PP)의 독과점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이다. 방통위가 지난 2월 입법 예고했다.

현행 방송법에서는 한 SO의 가입가구 수가 전체 SO 가입가구 수의 3분의 1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개정안에서는 유선방송과 IPTV, 위성방송을 포함한 전체 유료방송 가입가구 수의 3분의 1을 넘지 못하도록 완화됐다. 우리나라 SO 시장은 3대 MSO(종합 유선방송 사업자)인 CJ헬로비전과 티브로드, 씨앤엠이 각각 23%와 21%, 18%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데 개정안이 통과되면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부풀릴 수 있게 된다.

CJ헬로비전이 개정안 통과에 목을 매는 건 유선방송의 가입가구 수가 정체상태를 지나 급격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줄어든 가입가구의 상당수는 KT 스카이라이프 결합상품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SO들은 당장 디지털 전환 사업에 2015년까지 3조원 이상의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MSO들끼리 합병을 하거나 투자 여력이 없는 개별 SO들을 인수해 규모의 경제를 만드는 게 당면 과제라는 이야기다.

   
상위 3개 SO의 점유율이 62%가 넘는다. 그러나 CJ헬로비전 등은 SO 시장 점유율 규제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전체 유료방송 시장 점유율을 놓고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개정안에는 PP 규제완화도 포함돼 있다. 현행 방송법에는 한 PP가 전체 PP 시장 매출액의 33%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는데, 개정안에서는 49%까지 완화된다. tvN과 Mnet, OCN 등을 거느린 CJE&M의 지난해 방송부문 매출은 6719억원, 전체 PP 시장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29.2%에 이른다.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더 이상 매출을 늘릴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지난해 기준으로 33% 상한선은 7593억원이다.

SO는 이제 다른 SO들과 경쟁하는 게 아니다. KT가 스카이라이프와 IPTV의 결합상품으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고 포털 사이트들이 준비하는 개방 IPTV와 삼성전자 등이 출시하는 스마트TV도 새로운 경쟁 플랫폼이다. 일찌감치 미국에서는 유선방송을 해지하고 넷플릭스나 훌루 같은 정액제 스트리밍 비디오 서비스로 옮겨가는 코드 컷팅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SO 시장 기준으로 점유율 규제에 묶여있으니 CJ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유선방송 점유율은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스카이라이프(위성방송)과 결합상품으로 SO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KT의 성장세가 돋보인다. CJ헬로비전 등이 SO 점유율 규제를 불평등 규제라고 불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PP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CJE&M의 경쟁상대는 다른 PP들이 아니다. PP 시장에서는 지상파 계열 PP들과 경쟁을 하고 콘텐츠 판매 시장에서는 지상파와 동등하게 경쟁을 한다. N-스크린 전략이 화두지만 이제 지상파와 케이블 PP는 물론이고 인터넷 포털과 애플 같은 뉴미디어 플랫폼 사업자들이 경쟁을 해야한다. 문제는 CJE&M만 PP 시장 점유율 33%에 묶여 있을 뿐 다른 경쟁 사업자들은 이런 규제에서 자유롭다는 데 있다.

CJ만을 위한 CJ법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지만 CJ가 나름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방통위도 우호적이다. SO 규제완화 논의는 방통위 출범 이전인 IPTV 법제화 때부터 시작됐다는 게 방통위 입장이다. 홍성규 방통위 부위원장은 20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문방위에서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큰 틀의 규제완화 차원에서 하는 것”이라며 “문방위의 눈치를 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경향신문이 2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삼성 관계자들이 지연, 학맥 등을 총동원해 문방위원들에게 시행령을 반대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고 폭로해 주목된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또 다른 문방위 관계자도 “삼성의 대관(정부와 국회 등 공공기관 담당) 업무 담당자와 홍보 직원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 관계자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한겨레 23일 보도에는 좀 더 구체적인 로비 정황이 드러났다. 국회 사무처와 문방위 의원실에 돌았다는 문건에는 “방통위가 개정을 추진중인 방송법 시행령이 씨제이에 부당하게 특혜를 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겨레는 이 문건이 “출처가 불확실하다”면서도 “삼성에서만 쓰는 워드프로세서 훈민정음으로 작성돼 있고 최근 삼성 쪽에서 문방위 의원들에게 전방위 로비를 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삼성 쪽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방통위는 삼성의 로비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지디넷 보도에 따르면 이계철 방통위 위원장은 “스마트폰으로 세계를 주무르는 삼성이 그러한 로비를 하겠느냐”면서 “SO의 규제완화는 계획대로 갈 뿐”이라고 밝혔다. 한겨레는 “삼성이 나섰을 수도 있고 CJ의 과민반응일 수도 있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경향신문은 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 “(삼성이) 자신들이 콘텐츠 시장에 진입할 때를 대비해 시행령 개정을 방해하는 것 아니겠냐”고 지적했다.

지디넷은 “대부분의 해외 국가에서는 지상파의 케이블TV나 위성방송 소유만을 엄격히 금지시킬 뿐 SO에 대해 겸영이나 소유, 권역규제를 하는 나라는 드물다”고 지적했다. 한 SO 업체 관계자의 말을 인용,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29개 국가 중 13개국은 매체 간 교차소유에 대한 제한조차 없다”며 “오히려 KT는 IPTV와 KT스카이라이프의 유료방송 가입자가 이미 SO의 가입자 규제 상한선인 480만명을 넘어선 513만명을 넘어선 상태”라고 지적했다.

삼성의 로비 정황이 구체적으로 제기됐지만 대부분 언론은 이에 침묵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 관련 언론 보도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아버지이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형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상속재산 분쟁의 연장전이라는 게 업계 관측이지만 삼성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터무니 없는 억측”이라고 일축했다.

방통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양문석 방통위 상임위원은 미디어스와 인터뷰에서 “PP 매출 규제를 49%까지 늘려주면 지상파 계열 PP와 CJ 계열 PP와 이외에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며 “매출 규제를 풀면 군소 PP들의 인수합병이 확산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3위 SO인 씨앤엠 노동조합 이동훈 지부장도 “SO간 인수합병이 확산되면서 단기 차익을 노리는 금융자본의 진출이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CJE&M 관계자는 “CJE&M 계열 PP들이 ‘슈퍼스타K’나 ‘막 돼 먹은 영애씨’ 같은 수준 높은 콘텐츠를 만들었던 건 콘텐츠 경쟁력이 성장 동력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며 “인위적인 점유율 규제는 콘텐츠 투자 의지를 꺾고 PP들을 지상파의 하청기지로 전락하게 만들 것”이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지상파 계열 PP의 자제 제작 프로그램 비율은 12%, 나머지는 대부분 지상파 프로그램을 사들여 오는데 썼다. 반면 CJE&M은 자체 제작 비율이 50%가 넘는다.

사실 CJE&M이나 CJ헬로비전의 경쟁자는 삼성이 아니라 KT라고 할 수 있다. 플랫폼이 다변화되면서 이제는 지상파와 SO, PP, 통신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시대가 됐다. 태블릿PC와 스마트TV가 확산되면 이런 경쟁이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일부 언론이 CJ법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있지만 SO와 PP의 점유율 제한은 플랫폼 융합 시대에 걸맞지 않은 명백한 불평등 규제라는 게 CJ의 주장이다.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은 국회 의결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방통위 입장에서는 문방위의 의견을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19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문방위 의원들도 한 차례 물갈이가 된 뒤라 문방위에서도 아직 명확한 입장 정리를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SO와 PP, 통신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고 삼성까지 나서서 전방위 로비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른바 CJ법의 통과를 두고 방통위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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