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대로 사는 것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르며, 그 책임은 눈앞에 와서야 그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이후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선택을 주저하는 이유이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유이다. 하지만 욕망은 선택을 유발하며, 선택은 어떤 방식이든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한다. 그것은 선거도, 사소한 물건 하나의 구매 또한 동등하게 적용된다.

단지 우리가 온전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SBS 월화드라마 <추적자>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백홍석(손현주)이 처한 현실을 바로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소시민 딸의 죽음은 은폐, 왜곡되고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억압받는 <추적자>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 그 자체다. 우리의 투표가 강동윤(김상중)을 만들었으며 우리의 구매가 서회장(박근형)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욕망은 조작된다. 자신의 욕망이 과연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 우리 현실이 무서운 것은 지금 느끼고 있는 욕망이 진짜라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병에 걸린 가족의 병원비를 위해 홍식을 배신하는 황반장(강신일)이나 창민(최준용)은 욕망대로 행동했다기 보다 선택을 강요당했다. 제안이 달콤하기도 했지만 그 제안을 거절했을 때의 댓가가 엄청날 것이라는 걸 ‘학습’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살인도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 일 없이 묻을 수 있고 엄청난 재산 아무렇지 않게 되물림시킬 수 있지 않은가. 그에 반해 중산층이나 서민들은 병원비 지출이나 실직으로 빈곤층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기가 너무나도 쉽다.

일종의 강요된 선택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홍식을 배신하는 주변 인물들의 선택이 드라마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잡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추적자>에 등장하는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홍식처럼 ‘생존’을 걸어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당연한 진실에 생존이라는 문제가 개입하게 되어버린 현실이 그것이다. 진실이 일종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라면 생존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게 되는 욕망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그 가치와 욕망의 간극이 경제적 격차만큼이나 심각하게 멀어져 있다는 점이다.

성공과 행복이라는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추적자>가 보여주는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욕망을 이루는 방법은 ‘공동의 행복’이라는 가치를 너무나도 쉽게 무너뜨리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인간을 극단적인 경우에 몰아넣고 선택을 강요한 후, 그 후에 “인간은 다 그렇다” 평하는 것만큼 오만하고 폭력적인 것은 없다. 모든 비극은 잔인한 세상과 그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에서 나오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드라마에서나 가끔 등장해야 맞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뉴스는 연일 생존의 문제와 그 문제를 이런저런 수단을 통해 폄하하는 이들의 이야기 뿐이다.

욕망대로 행동하면 가치에 부합하는 것은 이상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간극은 너무나도 크다. <추적자>에서 보여지는 소시민들의 욕망은 결국 진실을 밝히는 것,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 아닌가. 서 회장과 강동윤의 욕망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갖는 것, 회사를 더 좋은 회사로 만드는 욕망이 사회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가치와 욕망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바로 정치가 할 일이다. 가치와 욕망의 차이와 충돌은 우리를, 사회를 분열적으로 만든다. 그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질문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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