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간 진보정당 활동하면서 제 경험에 의하면 당의 공조직 안에서 소통이 상당히 부재했다. 부서별 회의에서 다양한 당원들의 의견이 올라오기보다는 어떤 특정 정치적 의견이 관철되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운 안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의 창의성이나 다양한 당원의 의견을 모아내는 측면이 상당히 약했다”(정연욱 전 민주노동당 지방자치위원회 부위원장)

옛 민주노동당 초창기부터 관여해온 이들과 진보진영 활동가들이 통합진보당의 해묵은 당내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본격 토론회를 열었다.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특별위원회 주관 하에 31일 오후 국회도서관에서 ‘민주주의와 소통, 통합진보당의 혁신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토론회는 당의 근본 혁신을 위해 기획된 총 3차 연속 토론회중 첫 번째 자리였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당내 패권주의, 진성당원제, 폐쇄적 조직문화와 권위적 소통문화 등의 성찰과 대안 마련이 논의됐다. 천호선 새로나기 특위 위원이 사회를 맡고, 박원선 새로나기 특위 위원장, 정연욱 전 민주노동당 지방자치위원회 부위원장, 최순영 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오유석 여성정치세력연대 공동대표,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등이 패널로 참석해 공개 토론를 진행했다. 해당 토론회는 당 홈페이지에서 생중계되면서 인터넷상으로 당원을 비롯한 국민들의 의견을 받으며 3시간 넘게 진행됐다. 

 
이날 거론된 내용을 종합하면, 당의 공식적 의사결정·시행구조를 무력화시키는 ‘서클적 네트워크’에 기인하는 구조의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2008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분당했을 당시, 패권주의에 대한 제도적 대안을 구체화하지 못했다는 성토가 나왔다. 당내  절차적 민주주의와 운영 시스템의 문제 해결에 있어 ‘배려’의 문제로 바라본다거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르니까 그렇지 않다’라는 식으로 넘어간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강기갑 혁신비상대책위원장도 해당 토론회에 참석해 “오늘 이 자리가 새로나기”라며 “과거를 반성하고 혁신하는 한편, 미래에 무엇을 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당내 서클 네트워크의 정파성에 대해 “패쇄적 패거리 문화로 표현되는 것을 용납해선 안된다”며 “국민과 소통하지 못하고, 나만 옳다고 위치는 사람이 국민의 혈세를 지원받는 공당에 있어선 안 된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박원석 새로나기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발제에서 당권파가 당의 공식 결정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정면 비판했다. 그는 우선 “진상조사보고서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며 “조사의 시간, 권한, 방법 모두 제약과 한계가 있는 조사였지만, 백번 양보한다 하더라도 1차 진상보고서에서 확인된 사실만으로도 공당의 당내 선거에서 있어서는 안될 부실·부정 사례”라고 밝혔다.

한편 경기동부연합으로 지칭되는 정파그룹이 정파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있는 것을 없다고 주장하지 말자는 것이 제 생각”이라며 “정파 문제의 해법은 정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떤 정치집단에도 정파, 계파, 그와 유사한 의견그룹이 존재한다”며 “존재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떻게 기능하느냐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 관악을 야권후보단일화 부정경선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부터, 언론에서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정파가 심심치 않게 회자되며 검증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정희 전 대표를 비롯한 소위 당권파에서는 ‘경기동부라는 조직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20년 전에 있었고 사라진 조직이다’, ‘경기동부라는 조직에 가담해 활동한 적이 없다’고 대응해왔다. 이에 대해 박 위원장은 “(경기동부연합의 존재는)이미 당내에서는 공공연한 현상이자 사실이었던 정파의 문제”라며 “(이를 부정하며) 소위 오리발 내밀기식 대응을 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또 “‘특정인과 특정세력 죽이고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계획된 음모’로 주장하며, 부실 부정선거의 책임주체를 조기에 규정 해 버린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특정인과 특정세력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난 5월 2~3일 발표된 1차 진상조사보고서와 조사위에서는 부실과 부정을 저지른 당사자를 지목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권파는 진상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부터 진상조사보고서가 의도적으로 특정 세력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해왔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역시 이와 관련해  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 당권파의 거센 반발이 역설적으로 부정을 확증하는 것 같은 모양새를 연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8년 분당하면서 당권파의 이른바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 상식화돼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그것이 특별히 당권파를 공격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진상조사보고서를 통해 일반적으로 확증되기 어려운 부정이 확증된 것 같다"고 밝혔다.

한편 당권파가 강조하는 ‘진성당원제’에 대한 근본적 논의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더 이상 진성당원제가 필요 없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진성당원제는 초기 이념정당의 모델을 생각하면서 옛날에 나온 것인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라며 “당원의 진입 문턱, 사전 자격조건들은 과감히 철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에서부터 참여하며 당 운영을 지켜봤던 최순영 전 민노당 의원(17대)은 현 사태의 원인은 ‘욕심’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최 전 의원은 “먹을 것 없었을 때는 다들 좋았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먹을 거 생겨나니까 서로들 먹겠다고 난리 치는 거다”라며 “나눠먹기하기 위해 공직과 당직을 분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옛 민주노동당)1기 지도체제였을 때 최고위원 구성을 보면 정파들이 다 나눠먹었다”며 “그때 투표를 어떻게 할 거냐하는 문제, 정파 문제 때문에 원내 의원들과 최고위원 사이에 굉장한 논란과 갈등이 있었다”고 말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진보개혁세력이 스스로를 ‘내부의 시선’만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능력이 필요함을 강하게 주문했다. 소위 ‘운동권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민주화 이후에는 그런 소문화주의는 오히려 부정적 폐해를 더 많이 불러온다”며 “(일부 세력은) 자기 서클이나 정파에 대해 자체의 옳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려고 하면서 객관적으로 볼 때는 규범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소위 당권파로 분류되는 의원이나 관계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박원석 위원장은 이날 토론회가 끝난 직후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이날 토론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이었다”고 강조하며 “당이 혁신비대위 대 당원비대위라는 이중 구도에 있다거나 입장차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하고 혁신 절차에 들어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처음부터 (혁신이) 안 된다는 상황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고 덧붙였다. 혁신 비대위는 이날 논의된 여러 당내 민주주의 관련 핵심과제들을 중심으로 향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혁신 절차를 밟아나갈 의지를 보이고 있다.

2차 토론회는 오는 5일 '통합진보당의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재구성'이라는 주제로 역시 공개 진행되며, 색깔론 극복, 대중적 진보정당의 가치 확장, 현장 속의 민생정치 모색 등을 다룰 예정이다.  3차 토론회는 오는 7일 통합진보당의 노동중심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동자 정치세력화 15년을 돌아보고 향후 과제를 논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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