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을 불과 7개월 앞두고 ‘냉전프레임’이 대선구도를 강타할 것으로 예상한 이들은 얼마나 될까. 무덤 속에서 잠들어 있던 ‘냉전 프레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들이 있다. 청와대와 정부·여당, 보수언론만이 그 주인공일까. 꼭 그렇지도 않다. ‘근본적인 쇄신’을 바라는 국민 눈높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진보정치도 그 주인공 중 하나이다.

‘냉전프레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상 계륵과 같은 신세였다. 보수언론은 선거를 앞두고 어김없이 색깔론을 들고 나왔지만, 영향력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화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1990년대 초반까지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선거 판도를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떠올랐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는 그 영향력이 꾸준히 약화됐다.

상징적인 사례는 2010년 지방선거다. 6월 2일 지방선거를 일주일가량 앞둔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은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해 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냉전프레임이 최고조로 가열되던 당시에도 진보정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이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던 5월 24일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민노당 가입 교사 ·공무원 217명 파면·해임>이었다.

정부·여당과 보수언론은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의외의 참패를 당하면서 기가 꺾였다. 유권자는 냉전프레임에 기초한 정부·여당, 보수언론의 여론몰이에 동조하기는커녕 따끔한 회초리를 들었다는 얘기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처럼 보였던 ‘냉전프레임’이 2년이 지난 2012년 5월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주목할 점은 냉전프레임의 영향력이 심상치 않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5월 28일 라디오연설에서 “북한보다 우리 내부의 종북세력이 더 큰 문제”라면서 ‘종북’ 여론몰이에 힘을 보탰다. 경향신문은 5월 29일자 5면 <MB, 진보에 낡은 이미지 씌워 정권비리 덮기 의도 엿보여>라는 기사에서 “작심 발언의 배경에는 현재 여론 흐름이 있는 듯하다. 통합진보당 내 민족해방(NL) 계열인 당권파 문제가 연일 언론에 부각되면서 진보진영에 대한 여론 호응이 예전 같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검찰이 5월 22일 새벽 진보당사에서 당의 심장이라고 할 ‘당원 명부’를 탈취해 간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엄청난 역풍을 몰고 올 선택이다. 그러나 진보당이 여론에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검찰은 버틸 수 있었다.

검찰의 돌출행동은 진보정치 재구성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비상이 걸린 쪽은 진보진영이다. 진보·개혁 진영은 검찰의 공안몰이가 예고되는 상황이지만 진보당 사태의 본질을 대충 덮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냉전프레임에 속수무책 당하기만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29일 “이명박 대통령이 자기 모든 측근비리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임기 말에 때도 아닌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국내의 종북세력이 더 문제’라고 했다. 만약 국내 종북세력이 문제라면 지난 4년 반 동안 이명박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비판했다. 보수언론은 야당의 이러한 반발에 아랑곳없이 냉전프레임에 기초한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보수언론 입장에서 현재 상황은 물 만난 고기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대선이라는 중차대한 승부처를 앞둔 상황에서 대선 여론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진보당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한 치도 양보 없는 대치상황을 이어가는 것은 ‘이명박-새누리당(구 한나라당) 정권 재창출’을 기대하는 보수언론 입장에서는 “제발 이대로”를 외칠 수 있는 상황이다.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5월 29일자 <‘진보당 사태’ 잘 터졌다>라는 칼럼에서 “통합진보당의 NL파들이 저처럼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당이 야권 연대를 구실로 양보해준 덕분”이라며 민주통합당을 압박했다.

진보당 사태는 이미 이명박 대통령 측근비리 문제를 비롯해 여권의 각종 악재들을 관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하는 ‘블랙홀 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진보당은 물론 민주당까지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명박-새누리당(구 한나라당)’은 정권재창출의 꿈을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뤄낼 수도 있다.

한겨레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5월 26~27일 전국 19세 이상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가구전화 50%, 휴대전화 50%를 활용해 임의전화걸기(RDD) 방식으로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5%포인트)를 진행한 결과, 야권연대에 대해 여전히 지지한다는 응답은 21.7%, 과거에 찬성했지만 지금은 반대한다는 응답은 21.2%로 나타났다. 야권연대 지지표 절반이 이번 진보당 사태로 날아갔다는 얘기다.
진보진영에서 생각해야 할 대목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제 2~3개월만 지나면 여야는 대선후보를 뽑게 된다. 야권이 진보당 사태를 조기에 매듭짓지 못한다면 드라마틱한 단일화경선이라는 ‘히든카드’를 뽑아보지도 못한 채 대선을 맞이할 수도 있다. 뼈를 깎는 자성과 실질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은데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근본적인 쇄신’을 이뤄내야 한다는 점은 압박의 강도를 더하는 요인이다. 강기갑 진보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은 “더 큰 공동의 선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과 당이 희생과 헌신하는 것이야 말로 진보의 가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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