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9일로 파업 65일째를 맞으며 MBC와 함께 역대 장기 파업 기록을 경신해가고 있다. 파업이 아무리 길어져도 KBS 9시 뉴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방송이 이뤄지고 있다. 이는 후배들의 파업에 무심하거나 반대하는 보도국 내부의 선배층이 아직 많이 남아 제작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비판 기능을 상실한 KBS가 부끄럽고 괴로워 파업에 나섰다는 KBS의 주니어급 기자들은 ‘기자란 어떠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바로 지금 보도국에 남아 KBS 뉴스를 제작하고 있는 선배들한테서 배웠다는 것을 더 괴로워하고 있다.

입사 4년차인 정연욱 KBS 기자는 최근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에서 이런 심정을 드러냈다.

그는 4년 전 겨울 KBS 공채에 합격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랑스러웠지만 정작 신입사원, 수습기자를 거치는 동안에는 살벌했다고 회상했다. ‘눈사람 기자’로 스타가 된 박대기 기자가 자신의 동기라고 소개한 정 기자는 박 기자를 두고 “그(수습기자) 시절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적막한 새벽 경찰서 기자실 벽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며 “이런 예상 밖의 푸대접이 온전한 기자가 되는 과정임을 선배들은 끊임없이 상기시켰다”고 전했다.

이런 훈련과정보다 KBS를 바라보는 바깥의 현실은 KBS 새내기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현장에서 부딪힌 시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나를 비롯한 병아리 기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고인의 분향소를 취재하다 욕설을 들으며 쫓겨나는가 하면, 멱살을 잡히고 뺨을 맞기도 했다. 집회나 시위를 취재하기에 앞서 ENG카메라에 붙은 한국방송 로고를 떼내야 하는 참담한 상황도 겪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정 기자는 의욕과 패기가 오히려 짐이 됐다며 ‘기회의 땅’이던 KBS가 정작 누군가에겐 저주의 대상이 됐는데 이런 현실을 누구도 명쾌히 설명해주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하늘 같은’ 선배들조차 두려워하던 부장과 데스크는 침묵을 지켰고, 기자들 스스로는 자기검열을 하기 시작했다고 그는 고백했다. 일부 선배는 시청률이 높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KBS를 비난하는 시민들을 오히려 비난하기도 했다고 정 기자는 전했다.

그는 이 무렵 ‘이명박 언론특보’ 출신의 김인규 사장이 취임했지만 보도본부의 침묵은 깨지지 않았고, ‘5·18에 침묵하고 전두환을 찬양했던’ 사람을 ‘뛰어난 정치부 기자’였다고 소개하는 믿기 어려운 발언이 어느 선배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정 기자는 “이쯤 되니 비겁하다 여겼던 기자들의 침묵이 실상 자발적인 협력이었단 사실을 깨닫게 됐다”며 “그들은 새로운 사장에 재빨리 적응하는 기민함, 새로운 체제 안에서 맡은 바 역할에 충실히 복무하는 애사심에 근거해 행동하고 있었다”고 성토했다.

파업 60일을 넘긴 이 순간까지 김인규 사장이 직접 뽑은,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막내 저널리스트들이, 이제 막 직업 교육을 수료한 이들이, 단 한 명의 열외 없이 사장 퇴진을 외치고 있는 것 만큼 KBS의 현실을 아프게 고발하는 사례가 또 어디 있을까라고 그는 반문했다.

정 기자는 KBS가 부끄러워 파업에 동참했다는 한 막내에게 어떤 선배가 ‘나는 20년 넘도록 한 번도 KBS가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고 일갈한 사실을 소개하며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고 탄식했다.

오늘도 큰 문제없이 방송중인 KBS 9시뉴스를 두고 정 기자는 “보도국에는 생각보다 많은 ‘회사원’들이 파업과 상관없이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도 “반면 바깥에서는 ‘해사 행위’를 하지 않고는 자괴감을 견딜 수 없는 또 다른 회사원들이 사옥 주변을 맴돌고 있다. 혹은 보도국 안에서 침묵시위를 하며 동료들에게 ‘회사원’이 아닌 ‘기자’로 존재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들을 두고 “세월이 얼마나 흘렀건 자신이 왜 이 직업을 선택했는지 잊지 않은 사람들이자 혹독한 수습 교육을 받은 이유가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고 권력을 비판할 자격을 얻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며 “4년차 기자인 내가 파업을 접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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