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경선 부정 사태를 둘러싼 통합진보당의 갈등이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유시민 공동대표 등을 비롯한 비당권파의 ‘당 혁신 요구’ 의지가 굳건한 가운데, 이정희 공동대표가 8일엔 진상조사위원회와 조사결과보고서를 재검증하는 공청회를 열고 “진보정치를 해온 동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태도”라고 비난하며 입장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다. 

이정희 공동대표는 8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진상조사위원회와 보고서 재검증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유죄임이 입증되지 않으면 무죄라는 근대 국가의 상식이 송두리째 무너졌다”며 “21세기 한국사회 진보진영이 중세 마녀사냥으로 돌아갔다”고 강변했다. 이날 공청회에는 김선동 통합진보당 의원, 김재연 청년비례 당선자 참석했으나 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의 핵심실세로 알려진 이석기 비례 당선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선동 의원은 경기동부와 연합해 사실상 한 연합을 형성하고 있는 광주·전남 연합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재연 청년비례 당선자 역시 경기동부연합 출신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조사위가 부정의심사례 관련자들의 소명기회를 차단하고, 무고한 당원들을 선거 부정자로 낙인찍었다며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비록 부실은 있었을지언정 통합진보당의 허술한 선거관리체계로 인한 ‘부실’을 여론이 ‘부정선거’로 몰아가며 ‘중세식 마녀사냥’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진상조사위원회의 부정의심사례로 지목된 대표적인 11곳의 지역위원 및 투표관리자들에게 내막을 직접 확인한 사실을 전하며, 이중 절반가량이 투표관리자의 ‘허술한 실수’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PPT화면을 띄우고 일일이 소명내용을 전달했다. 그리고 통합진보당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며 헌신한 당원들의 노력과 그들에 대한 신뢰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날 공청회에 각 지역에서 찾아온 부정의심사례 당사자들 역시 소명 발언에서 ‘진보정당의 원내교섭단체 달성을 위해 얼마나 사심 없이 헌신하고 노력해왔는지’를 강조하며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이인석 충주지역 공동위원장은 “서명을 볼펜으로 한 걸 나중에 집에서 컴퓨터로 작업하면서 사인펜으로 덧쓴 것”이라며 “불법인지 부실인지 제 조그만 실수는 인정하지만 신문에 대대적인 부정선거로 나올 수 있는 건이지 너무 어이없다”고 밝혔다.

한편 조사위 보고서에 ‘선거인 명부 이름과 서명 이름이 전혀 다른 경우’로 조작의심사례에 오른 당사자가 참석해 정황을 직접 해명하기도 했다. 해당 증거사진에는 선거인명부의 서명란에 ‘병신’이라고 적혀있는 부분이 촬영돼 있다.

문제가 된 서명의 선거인인 최병섭 당원(경기도 오산시)은 친구인 투표관리자가 자신의 이름을 장난으로 대신 서명하면서 발생한 해프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점심 먹고 가면 대기하는 곳이 있다. 대기실 갔더니 (비례 경선)선거 투표를 한다고 준비를 하고 있더라. 박수일이라는 친구가 사인을 하고 있기에 ‘야 내꺼 사인 좀 해라’고 했더니 장난 좋아하는 그 친구가 나보고 ‘병신’이라고 썼다고 웃더라. 나는 설마 그렇게 썼으랴 하고 말았다”며 “그런데 갑자기 신문에도 나오고 무슨 부조리나 한 것처럼 나왔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조사위가 명백한 부정을 입증하지 ‘않은’ 채 부실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당원을 모욕하고 당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있다고 분개했다. 이 대표 및 지지자들은 조작이 있었다는 명확한 확증이 없기 때문에 전국운영위의 의결사항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조사위가 프로그램에 의한 투·개표 ‘조작여부’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조사위의 설명에 따르면, 조사위가 지난 4월 17일부터 5월 1일까지 조사한 바로는 조사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투표 프로그램과 데이터 이상여부는 판별이 불가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 조사위의 결과보고서에서는, 개발 및 운용 전반의 ‘형상관리’ 부재로 투표시스템 프로그램의 최초 버전 및 이후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가 됐다. 형상관리란 쉽게 말해 컴퓨터 프로그램 시스템의 변경 사항들에 대한 기록과 검증을 의미한다.

이것의 부재로 인해 소스코드 변경으로 프로그램이 오류를 일으켜 투표 결과 값이 바뀌었을 가능성이나, 누군가가 득표 값을 조작했을 가능성을 판독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조사위는 “만에 하나 투표 기간 소스코드를 변경할 필요가 있더라도 관련자들의 참관 하에 이전까지 진행된 데이터를 저장한 백업본을 남겨두는 것이 상식”이라는 해당 IT 전문가들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공청회에서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형상관리 프로그램은 수동조작이고 검증에 쓰는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한다”며 “진상조사위의 보고서 내용은 형상관리 프로그램이 뭔지 몰랐던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어 “로그 파일을 보는 것이 조작이 있었는지를 보는 첫걸음”이라며 “왜 조사위는 형상관리 프로에만 매달리고 로그기록은 확인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대표는 “청년비례 관련해서는 로그파일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히며 “조사위가 로그파일을 구할 의지가 있었다면 구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았던 조준호 공동대표는 4일 전국운영위회의에서 “비밀투표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해 실제 값 검증 하지 못했다”며 “여기에서 결정해 준다면 그에 대해 추가로 조사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투표에 대한 비밀보안성으로 전면적, 공개적 조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투표 데이터에 조작이 있었는지 구체적 확인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부풀려지거나 진실과 다른 책임을 뒤집어씌운다면 누구도 함께 일어나지 못한다”며 “그래서 정치인생이 끝날지도 모르는 이 길을 택해서 여기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열과 성을 다 바쳐 함께 해온 통합진보당의 수많은 당원들과 함께 공감해온 상식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통합진보당을 무너뜨리려는 보수언론의 공격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했다. 명백한 투표 조작의 증거가 밝혀지지 않는 한 ‘비례 경선자 총사퇴 및 혁신비대위 구성’안건은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못박은 것이다.

이로써 당장 오는 10일 열릴 전국운영위원회와 12일 중앙위원회의가 지난 4~5일 전국운영위원회에서처럼 극심한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날 공청회에서 이정희 공동대표와 그를 지지하는 당원들이 보인 ‘결사항전’의 모습 역시 이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이들은 ‘당권과 이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물러설 수 없는 진실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이 대표의 발표와 연설이 끝난 후 곳곳에서 적지 않은 당원들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본문 중에 김선동 의원 "광주·전남연합 소속"이라고 된 부분을 "광주·전남연합 출신"로 수정합니다. 5월9일 14시10분.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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