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에서는 1998년 이후 두 민주정권의 시기를 ‘잃어버린 십 년’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막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이기도 하지만 노동과 노동자운동이 위기에 빠졌다는 것에 대한 인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4월 30일 박하순 노동자운동연구소 소장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98년 이후 십 년을 “노동자운동 패배의 역사”라고 했다. 그러나 박 소장은 민주노총만 탓할 것은 아니라며 패배의 이유를 노동자 내부의 분열에서 찾았다. 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 없이 IMF 경제위기를 보냈고, 정리해고의 경험은 2008년 시작된 경제위기는 노동자운동을 더 위축시켰다고 평가했다.

박하순 소장은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이 현재 처하고 있는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박 소장은 민주노총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지만 ‘국회의원 만들기’라는 무리수를 뒀다고 평가했다.

박 소장은 그리스와 월가 점령을 예로 들며 ‘지금 당장 혁명하자’는 좌파들의 주장에 대해 “혁명적인 정세가 도래한 것 같지만 혁명의 조건이 하나도 갖춰있지 않다”며 “우리의 역량을 단기간에 투기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현 상황에 대해 “노동자 내부가 분열돼 있고 대안이 모호한 위기의 정세”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발마적 저항만 있는 엄혹한 시기”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박하순 소장과 일문일답이다.

-흔히 1998년을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화된 시기로 본다. 이 시기 노동자운동의 흐름을 개괄한다면.
“활동가는 물론 노동자운동 전체가 1998년 경제위기를 예상하지 못했다. 일부 예상했다손 치더라도 영향은 미비했고, 불시에 닥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 민주노총의 기조는 재벌개혁이었다. 재벌의 방만한 문어발식 경영을 독립경영 형태로 바꾸는 것이었다.
세계통화기금을 거부할 수 없었다. 디폴트를 거부할 만한 의지도 없었고, 이론적 역량도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온 것은 정리해고였다. 김대중 정부가 표방한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별 다른 게 아니었다. 또한 그는 IMF와 다른 종류의 정책을 펼칠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IMF가 주문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전면적으로 관철됐다. 정리해고법과 파견법이 통과됐다. 노동계에서는 1996~1997년 때 했던 파업을 다시 해야 했다. 그러나 단병호를 중심으로 꾸린 비대위는 파업을 못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반신자유주의 입장을 가지고 사회 전체를 개조해야 한다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이후 민주노총은 정리해고를 일부 수용하고, 노사정 위원회를 들락날락했다. 이때는 아직 활동가 수준에서 최소한 내 조합의 문제가 아니라도 상급조직에 공격이 들어오면 같이 싸우자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런데 자잘한 투쟁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패배가 시작됐다. 2000년 대 들어 지하철 투쟁이 실패했고, 발전은 민영화를 저지했다고 하나 네트워크 민영화는 문제가 된다는 세계적 흐름이 생길 즈음이라 사실상 승리했다고 보기 힘들다. 대부분 투쟁이 다 패배했다. 1998년 이후 10년은 한 마디로 패배의 역사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노동자운동에 대해 평가한다면.
“2008년 금융위기가 왔다. IMF를 경험한 노동자들은 모두 몸을 사렸다. 양보할 건 미리 양보했다. 양보할 수 없는 지점에서 대량해고가 생겼다. 쌍용차다. IMF 때 현대차는 270명을 해고했지만 2009년 쌍용차는 직·간접적으로 2천 명 넘게 해고했다. 한 사업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지만 민주노총의 역량이 계속 축소된 과정에서 같이 투쟁할 사업장도 없었다. 고립무원 속에서 당하게 됐다. 정리하자면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적 정세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노동자 내부의 분할, 경제위기, 정부의 탄압, 투쟁의 지속적 패배를 통해서 역량이 제로 포인트로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총은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려고 했다. 노동자운동 내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나.
“김영훈 위원장의 민주노총이 제도정치로 이 상황을 돌파해보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주변을 설득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자기들 이권을 챙기는 꼴이 됐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긴 하다. 그들은 운동의 역량으로는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거를 통해 정부를 바꾼다면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민주노총 내 주류의 생각이 큰 것 같다. 일부에서는 그리스 투쟁을 모델로 좌파 정권을 세우자는 얘기가 있다. 물론 그리스 노동자의 총파업은 민중들의 불만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따져보자.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반발이 좌파 집권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대부분 보수파 아니면 신자유주의 세력이 재집권 한다. 유일하게 그리스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30% 정도 지지를 받고 있지만 두고 볼 일이다. 최근까지도 극렬하게 저항했던 스페인은 우파가 집권했다.”

-민주노총이 제도정치에 너무 기대려는 것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집행부의 행태, 투쟁의지를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분할, 분열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노동자 내부를 단결시켜서 투쟁을 수행하는 건 쉽지 않다. 일부 좌파와 젊은 활동가들이 너무 쉽게 운동을 재단하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전 세계적으로 제대로 노동자운동을 벌이고 있는 곳이 없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와 비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곳은) 극한 상황에 몰려 단발마로 투쟁하는 것이다. 훌륭한 집행부가 나와도 주력인 사무, 공공, 금속 대사업장 노동자들을 끌고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시키는 것이란 쉽지 않다. 또 이런 노력을 민주노총이 전혀 안 했다고 할 수 없다. 2000년대 들어 비정규직 문제가 쟁점이 됐지만 민주노총이든 좌파든 청소노동자를 새로 조직하는 데 그쳤다. 민주노총의 우경화를 지적하는 것은 선거 개입을 두고 하는 말인데 앞서 지적했듯 패배의 누적이 상당하고, 조합원 스스로 투쟁을 안 하려는 점에서 집행부가 우회로를 생각한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민주노총 폐기론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런 점에서 보수적이다. 민주노총 버리고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조직해 운동을 잘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비정규직 조직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력인 금속과 공공이 우경화되면서 집단 이기주의와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지만 결국 이 단위들이 운동의 중심과 근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운동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이들의 인적, 재정적 자원이 필요하다. 폐기론은 경기 동부, 전국회의라는 단위에 대한 비난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장에 들어가 활동을 할 만한 단위는 거의 없다. 새로운 조직화와 투쟁을 담당할 세력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민주노총은 계속 비정규직, 정리해고제 반대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당연히 그런 구호를 제출해서 투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리해고는 법을 개정해야 문제이기도 하고, 단위사업장에서 실제로 정리해고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인데 쉽지 않다. 문제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업이 망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근로조건을 저하시켜서 고용을 유지할 수 있지만 이는 기업도 바라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동종업계 노동자들의 조건을 맞춰야 기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전면적으로 내걸 수 있는지 회의적이다. 정규직들이 자신의 문제로 받아 함께 싸우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한 사업장의 30~40%가 비정규직인데 이를 정규직화하자고 하면 정규직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의 지위가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적이다. 현대차 비정규직들이 투쟁을 했지만 정규직 조합원 수준에서 가담이 없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게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현실적 조건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철폐나 정리해고 폐지는 체제 이행과 더불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국적 수준의 투쟁이 아닌 상황에서 이런 요구가 전면 관철되면서 마무리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는 입법 요구에 가장 적절한 시기이기도 하다. 어떤 구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기본적으로는 노동자 내부의 분열을 추스르고 단결을 기할 수 있는 요구나 정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액임금 인상제와 연대고용제도를 고려할 수 있다. 물론 한계는 있다. 정액임금제는 임금 격차를 인정하되 비율을 줄여 나가자는 것이다. 연대고용제의 핵심은 정규직 노동시간 축소인데 임금 삭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시간당 임금을 올리되 휴일근무를 줄이고, 비정규직들의 노동조건을 높이는 방식이 이상적이다. 부연하자면 휴일근로를 연장근로로 포함시켜 노동시간을 주 52시간 넘지 않게 만드는 것을 노동부가 고려하고 있고, 6월부터 관련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다.”

-현행 민주노총의 문제점은 뭔가.
“총연맹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은 김영훈 위원장과 그리 원만하지 않다. 김 위원장은 이들을 다독이고 아울러야 하는데 그런 역량이 있는 것 같진 않다. 위원장의 무능, 민주노총 주력세력의 선거 위주 전략이 어우러져서 현재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초라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임은 일차적으로 주력세력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진보신당 독자파도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노회찬, 심상정의 우경화된 행보가 이런 상황에 일조한 면도 있고, 좌파가 무능한 탓도 있다. 일부 좌파도 진보정당(진보신당+민주노동당) 통합 이후 선거연대라는 자신의 노선을 관철하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민주노총 주력세력의 ‘국회의원 만들기’라는 무리수가 나왔다. 정리하자면 잘못된 노선과 무능이 결합된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내부의 분열이라는 정세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지도부 교체만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호언장담은 받아들일 수 없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다. 실체가 뭔가.
“자본주의의 불황기, 장기침체에서 부자들이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격을 통해 위해를 가하는 정세라고 할 수 있다. 위기에 빠진 자본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동자를 탄압하고 있다. 자유주의 세력으로 변신한 기존 보수 세력도 있고, 새로운 자유주의 분파도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 눈에 대안이 보여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없다. 유럽과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말마적 저항을 하고 있지만 포지티브하게 대안을 제출하는 세력은 없다.”

-경제위기 이후 나치가 집권했다. 그래서 최근 파시즘을 예상하는 사람도 꽤 있다.
“노동자 내부가 정말 반동으로 돌아설 수 있다. 현재 지위를 보장할 수 있다면 어용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다. 제도정치로 확대될 수도 있다고 본다.”

-위기를 극복할 방법은 없다는 말인가. 희망버스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새로운 사회적 연대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대안이 모호하다. 전투성을 독려하고 투쟁으로 떨쳐 일어나기에는 이념적으로 부족한 시대다. 집행부도 그렇고 많은 노동자들이 현재의 지위와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서 그렇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모든 생명체에는 자기보존의 욕구가 있다. 혁명적인 정세가 도래한 것 같지만 혁명의 조건이 하나도 갖춰있지 않다. 굉장히 엄혹한 시대다. 일부 좌파는 ‘곧장 혁명에 매진하자’고 주장하는데 말이 안 된다. 조직화와 이론적 역량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리한 상황이다. 현재 우리의 역량을 단기간에 투기할 수 없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