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와 제민일보는 언론노동운동이 일궈낸 상징적 성과물이다. 언론노조의 공정보도 노력에 국민적 성원이 따를 경우 쓰러져가는 회사를 살릴 수도 있고 또 새로운 언론사를 만들 수도 있음을 현실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부산일보

88년 사상 첫 파업통해 편집권 독립 쟁취

사장이 ‘숙명적 여당지론’을 말할 정도로 부산일보는 대표적 여권매체였다. 이 신문사는 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작업에 따라 어부지리로 당시 부수나 사세가 앞서있던 국제신문을 인수, 5공 시절 부산지역 유일의 언론사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87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부산일보도 그 ‘독점적 지위’를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5공시절 부산일보가 보여준 보도 태도에 대한부산 시민들의 실망감 역시 정점에 달해있었기 때문에 부산일보의 몰락은 단순한 위기감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88년 7월 부산일보 노조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6일간의 파업을 통해 편집권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상황을 한순간에 바꿔놓았다.

오욕의 과거를 솔직하게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려는 부산일보 노조의 노력은 부산 시민들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놓았다. 부산시민들은 ‘부산일보 파업 지지및 민주언론 추진 부산시민운동협의회’를 발족, 부산일보의 ‘새로운 변신’을 지원했다. 파업이 끝난후 신문부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 다. 그 눈부신 사세확장의 속도에 자신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고 파업당시의 위원장이던 조영동씨(현 편집국 경제부장)는 회고한다.

제민일보

노조가 창간 모체 …제주민의 사랑 듬뿍

제민일보는 ‘특별한’ 신문사다. 노동조합이 창간 모체라는 점이 그렇고 ‘도민주’를 모아서 만든 신문이라는 점이 그렇다. 제주신문 노조는 5공시절 전기환, 전경환과 호형호제하면서 제주신문을 ‘개인적 사유물’로 만들었던 김대성 사장의 복귀 음모에 맞서 89년 11월 11일부터 이듬해 1월 25일까지 78일간의 장기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전기와 수도까지 끊는 김사장의 물리적 탄압에 의해 혹한의 거리로 내쫓기고 말았다. 이들은 그후 자신들의 퇴직금과 제주도민들의 ‘지역 정론지’에 대한 갈망을 하나로 묶어 ‘제민일보’를 창간했다. 제민일보는 현재 제주도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신문으로 제주도민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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