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10월29일을 기점으로 한국언론엔 ‘새로운 질서’가 움트기 시작했다. 언론을 자신들의 통제권 안에 넣고 있었던 권력과 언론자본에 맞설 수 있는 조직화된 세력으로서 ‘언론노조’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언론사 최초의 노조인 한국일보 노조의 출범이 그것이다. 한국일보 노조의 탄생을 기점으로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41개 언론사에 노조가 결성됐다.

언론노조 출범은 먼저 ‘부끄러움’에 대한 자성에서 출발했다. 이 ‘부끄러움’은 88년 11월26일 언론사노조의 전국 조직으로 출범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의 ‘자기고백’에 잘 담겨있다. “우리는 한 시대의 거대한 악에 편승해 있었고, 겁에 질려 있었으며, 우리들 자신이 시대의 피해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시대의 가해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언론노동운동 7년의 역사는 이같은 정서를 바탕으로 언론내부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 접점은 편집권이었다. 경영진의 전유물이자 최종적으로는 권력의 것이었던 편집권을 제작 일선의 현직 언론인들, 나아가 국민의 공유물로 돌려놓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됐다.

정부와 언론자본과의 첫 대결의 장이었던 부산일보에서는 88년 노조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 ‘편집국장 3인 추천제’를 확보했다. 노사가 합의한 단체협약엔 ‘편집권은 기자들이 공유한다’는 문구가 선명하게 인쇄됐다.

KBS, MBC에선 청와대 대변인 출신의 정구호, 김영수사장이 노조의 ‘과거청산’ 요구에 밀려 언론계를 떠났다. 또 편집국장 직선제, 임명동의제, 중간평가제 등 편집권 독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마련됐다. 실제 중앙일보는 지난 91년 금모씨를 편집국장에 임명하려했으나 기자들이 임명동의에 거부, 좌절되기도 했다.

이같은 언론노조 활동은 언론 내부 권력관계의 근본적 재편을 가져왔다. 지난 30년간 한국언론을 규정해온 ‘권언유착’의 은밀한 관행이 언론노조의 ‘조직적 저항’에 부딪혔던 것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딛고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언론노조의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는 90년 이후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6월항쟁의 여진이 가라앉으면서 그동안 움츠리고 있던 권력과 언론 내부 수구세력의 일대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언노련의 불법화(정부는 언노련이 한국노총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고필증 교부를 거부했다)와 사상유례 없는 언론사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 이어졌다.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정부와 언론자본의 위기의식은 90년 KBS, 91년 평화방송, 92년 MBC의 경찰투입이라는 ‘강압적 통제’로 현실화됐다.

90년 KBS 사태와 관련 당시 문공부 장관이었던 최병렬 현 서울시장은 훗날 사태의 발단이 됐던 서기원씨의 사장 임명 배경에 대해 “노조를 강력히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고 밝혀 이 사태가 방송을 권력의 통제 아래 묶어 두기 위한 것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언론은 ‘권위주의적 구질서로의 회귀’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는 신문과 방송의 극심한 경쟁 국면 돌입 시점과 맞물리는데 신문사는 월요판 발행, 증면 등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 방송은 상업방송 SBS의 출범과 맞물려 시청률 경쟁에 내몰렸다. 이 와중에서 ‘자사이기주의’는 갈길 바쁜 언론노조의 발목을 잡았다. 표면적으로 언론자본의 영향력은 보다 더 강력해졌으며 언론노조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언론노조가 쌓아온 성과는 결코 적지않다. 7년여동안 30여명의 구속자와 50여명의 해고자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편집국 내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성역’으로 남아있던 언론을 심판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제 언론노조는 제2의 도약이냐 아니면 자본에 예속되느냐는 기로에 서있다. 이 시점에서 국민들은 지난 7년의 가시밭길이 언론노조를 강하게 키워온 원동력임을 다시 확인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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