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자들에게 ‘야마’는 생명이다. 기자를 시작한 순간부터 야마 잡는 연습을 한다. 데스크 역시 이 야마로 현장 기자들을 닦달한다. ‘도대체 이 기사의 야마가 뭐야.’ 야먀 없는 기사만큼 데스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없고 이런 질문만큼 현장 기자들을 괴롭게 하는 것도 없다.

기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이 야마란 말은 기사의 주제, 그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쉽게 정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야마 뒤에 숨어 있는 ‘의도’와 그 의도적인 야마가 탄생하게 되는 구조적인 맥락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선 중요한 문제는 ‘누가’ 야마를 잡는가하는 것이다. 현장 기자가? 아니다. 지면의 절반 이상 혹은 훨씬 더 많은 비중의 기사들의 야마가 편집국장과 각 부서 부장들이 참석하는 편집회의에서 결정된다. 언론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사일수록 야마와 취재에 대한 지시는 구체적이다.

때때로 기자들이 자신이 현장에서 취재한 것들을 바탕으로 기사를 생산해내는 주체인지, 지시를 받아 기사를 쓰는 아르바이트생인지 헷갈릴 정도다. 데스크에 의해 기자 이름만 빼고 기사 전체가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다.

기자 역시 2~3년이 지나면 취재를 바탕으로 야마를 잡는 것이 아니라 야마를 잡고 취재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야마를 잡고 쓰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기자와 언론사의 야마에 맞는 취재원만 찾으면 된다.

이쯤 되면 야마에는 언론사의 논조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언론사의 당파성이다. 무색무취의 신문을 만들 것이 아니라면 야마는, 데스크의 야마 지시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나온다. 그럴까.

좀 더 멀찌감치 내다 서서 한국 언론의 ‘야마 역사’를 살펴보자.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돼 기나긴 시간을 군사 독재 정권 아래서 보낸 언론사는 소위 객관적 저널리즘이란 이름으로 정보 전달을 자신의 역할로 제한했다. 하지만 87년 민주화 이후 자유를 맞닥뜨린 언론사들은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발달도 영향을 줬다. 속보나 정보 전달은 인터넷 언론에 당할 수 없게 됐다. 뉴스의 관점, 해설이 새로운 분야로 떠오르면서 언론사는 더욱 야마를 중요시하게 됐다.

흥미로운 대목은 언론들이 자사의 이익과 관련돼 있거나 각각의 정치집단이 뚜렷하게 대립하는 쟁점에 관해 더욱 선명한 야마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문의 방송 진출을 허한 미디어법 처리를 전한 보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겨레에서 미디어법 관련 취재를 했기도 한 저자 박창섭 전 한겨레 기자(미국 서던일리노이대학교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학 박사과정)는 '야마를 벗어야 언론이 산다'는 저서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 5개 일간지 및 미디어전문매체인 기자협회보와 미디어오늘 기자들과의 심층인터뷰를 통해 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겉으로 드러난 야마를 보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겸업 허용으로 인한 미디어산업의 발전을 강조하며 미디어법 처리를 찬성했다. 반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미디어의 공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디어법을 처리되면 안 된다고 설파했다. 한국일보는 공공성을 강조하되 미디어법 처리는 여야 간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는 사안이라고 바라봤다. 

이 사안에도 야마 뒤엔 의도가 숨어있다고 저자는 본다. 야마를 통해 자사의 이익을 얼마나 추구하려고 했으며 신문의 방송진출이 절박한 언론사일수록 야마는 더욱 공격적이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야마가 선명해질수록 사안의 실체는 가려진다는 것이다. 상대방 진영의 논리를 강하게 반박할수록 기사는 한쪽으로 치우쳐 결국 사안의 종합적인 면모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메시지다.

하지만 결코 이는 두루뭉술한 기사를 쓰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중립적인 결론이 내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취재를 객관적으로 하라는 뜻 아닐까.   

야마를 버려라, 최대한 모든 각도로 사안에 접근하라, 진실을 재단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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