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등으로부터 유산 소송을 당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최근 ‘한푼도 못주겠다’고 발언한 것과 관련해 한겨레에서 이 의미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한겨레 기사의 주요 대목을 삭제해 내부에서 거센 반발이 제기되고 있다.

한겨레 데스크는 기사를 출고한 기자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이를 손질한 것으로 나타났고, 삼성 기사에 대해 이런 일이 여러차례 반복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한겨레 기자들은 성명을 내어 기사 손질에 대한 편집국장의 입장표명과 경제부장의 해명을 촉구하고 나서 내부의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한겨레는 지난 18일자 2면에 실린 <이건희 “한푼도 못 줘…대법원 아니라 헌재까지라도 갈 것”>에서 이건희 회장이 이 같은 발언을 한 배경을 해설한 부분을 드러낸 것으로 밝혀졌다. 삭제된 부분을 두고 기사를 작성한 김진철 한겨레 기자는 “삼성이 이의를 제기한 부분”이라며 데스크가 자신의 동의없이 일방 삭제했다고 밝혔다.

삭제된 대목은 “삼성물산·삼성전자 직원의 이재현 씨제이 회장 미행으로 사회적 비난이 이는 가운데 분위기 반전을 위해 이 회장이 직접 발언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온다”, “삼성그룹이 미행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이는 상황에서 더는 밀릴 수 없다는 인식이 커졌다는 얘기”라는 것으로 이 회장의 행보를 분석한 기자의 해석이었다.

김진철 기자는 기사가 수정돼 실린 18일 오전 10시께 사내 온라인 게시판에 기사 수정 과정에 대해 “데스크가 야간에 기자와 협의 없이 기사의 내용과 방향을 바꾼 사례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삭제된 부분이 삼성에서 이의를 제기한 부분인 점을 들어 삼성 관련 기사에 대해 그런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기자는 “17일 저녁 삼성 측의 전화를 받고 삼성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3판 기사를 일부 수정했지만 5판에는 자신도 모르게 삼성에서 이의를 제기한 부분이 통째로 실종됐다”며 정남기 부장이 삼성의 전화를 받고 관련 부분을 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를 본 다른 기자들도 경제부장의 해명과 편집국장의 입장 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겨레 공채 16~21기 기자들은 19일 오후 성명을 내어 이번 논란에 대해 정남기 경제부장과 박찬수 편집국장의 공식적인 입장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남기 경제부장은 같은 날 오후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삼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일이 없었고 삭제한 부분이 합리적 추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판단해 삭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정 부장은 “미행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분위기 반전을 위해 은둔형 회장이 갑자기 강성 발언을 했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 아니라고 봤다”고 밝혔다.

정 부장은 19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삼성에서 전화를 오는 경우가 있지만 당일 그 기사와 관련해 전화를 받은 일이 없다”며 “삼성의 부탁으로 기사가 바뀐 것이 아니어서 심각하게 논의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협의 없이 기사를 일부분을 삭제한 것에 대해 정 부장은 “그 정도는 데스크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일상적 데스크 활동”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찬수 편집국장은 20일 오후 “김진철 기자가 문제제기하고난 다음에야 처음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며 “경제부장이 삼성으로부터 전화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압력 때문이 아니라 데스킹 과정에서 빠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박 국장은 “다만 데스킹 과정에서 기자와 충분히 협의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보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같은 해명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김 기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해명을 납득할 수 없다”며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 강하게 항의했고, 사과를 받았지만 또 반복됐다”고 비판했다.

김 기자는 “문제는 삼성의 전방위적인 언론 대응을 언론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이라며 “현장기자와 협의하지 않고 자의적인 기준으로 기사의 방향과 핵심적인 내용을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진철 기자는 이어 “기사가 바뀐 걸 다음 날 조간신문을 보고 알았다”며 “데스킹 과정이 더 나빠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대부분 언론이 삼성에 순치돼 있고 한겨레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부딪히는 게 너무 많다”고 개탄했다.
 
박중언 한겨레 노조위원장(전국언론노동조합 한겨레지부장)은 “기자의 의혹이나 부장의 해명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있다”며 “전화를 받았는지 아닌지 파악중”이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이번 논란을 두고 “지금까지 몇 차례 제기된 문제지만 일상적인 수준을 넘은 데스킹이 이루어졌다”며 “절차의 측면에서 볼 때 데스킹 과정이 예전보다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앞서 한겨레 노조는 지난달 28일 발행한 ‘진보언론’에서 ‘삼성 또 너냐… 수정된 기사, 어떻게 봐야하나’에서 같은달 6일자 <삼성가 소송 뒤엔 ‘이재용-이재현’ 후계다툼> 기사 역시 데스크가 기사 최종 수정 전에 기자와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기사에서는 삼성가 3세 이재용씨에 대해 한겨레 데스크는 “2000년 손댔다가 실패한 이(e)삼성은 아직도 그의 꼬리표다”라는 대목을 삭제했고, “실제로 자손들이 차명주식을 나눠 가졌다면 소송을 제기한 이맹희씨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정반대의 해석을 담은 문장이 들어갔다.
 

진보언론은 ‘이재용 승계가 좌절되려면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이제는 좀 더 현실적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균형을 잡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본다’며 ‘삼성에 대한 원활한 취재를 위해서도 형식적 균형을 보이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진보언론은 “당시 기자도 ‘균형’에 대해서 공감한다면서도 주간과 아침보고 때 별다른 주문이 없었고, 수정 과정에서 삼성의 주장이 너무 많이 들어가 기사 자체의 맥락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전했었다. 한겨레 노조는 “사안의 진실은 정당한 데스크 작업일 수도, 비난받아 마땅한 기사 ‘마사지’일 수도, 그 양 끝 사이의 어느 지점일 수도 있다”며 구성원들에게 판단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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