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남동쪽에 위치해 중국과 러시아와 접경지역인 둥닝셴(東寧縣) 에는 일본 관동군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동닝요새(東寧要塞)가 있다. 이 곳은 국내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러시아 항구 블라디보스토크와 200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이곳은 일본이 소련의 연해주를 삼키려는 야욕을 품고 전략적으로 구축한 지하요새다.

1930년대에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일본은 중국 동북지역의 석탄, 목재 등 천연자원을 약탈해 일본으로 운반할 항구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요새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역사속의 유물로 남게 됐다.

둥닝요새는 중러접경 도시인 쑤이펀허(綏芬河)시에서 가까운 둥닝셴(東寧縣) 일대에 만들어져 그 명칭을 따왔다. 둥닝 지하요새군(要塞群)은 헤이룽장성 쑤이양전(綏陽鎭) 베이옌왕뎬(北閻王殿)에서 간허쯔(甘河子)까지 중러 접경을 따라 중국땅에 10개가 잇따라 밀집해있다. 요새는 성훙산(勝洪山), 쉰산(勛山), 싼자오산(三角山), 마다산(麻達山), 409고지(高地), 차오러산(朝日山), 추완산(出丸山), 베이톈산(北天山)요새 등이다.

이 요새군의 폭은 100㎞, 종심은 50㎞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다. 일본 패망직전 이곳에서 소련과 일본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소련이 승리한 뒤 대부분 폭파해 현재는 쉰산(勛山)요새중 일부가 유적지로 복구돼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이곳은 2차대전의 최후의 격전지로 ‘동방의 마지노선’이라고 불린다. 중소와 일본은 이곳에서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현재 쉰산요새에는 둥닝요새역사진열관(東寧要塞歷史陳列館)이 세워져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산 아랫자락에는 장완녠(張萬年) 전 중국국가군사위 부주석이 쓴 “국치를 잊지말고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자”(勿忘國恥,强我中華)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매일 국내외 관광객 약 1천명이 방문한다.

소련 연해주 공략 작전의 발판 삼아…일본군 13만명 아시아 최대 지하 땅굴 요새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뒤에 중국대륙 침략을 확대하면서 만주동쪽으로는 소련의 연해주를 공략할 작전을 세우게 된다. 일본은 1934년 5월 12일 관동군에 명령을 내려 ‘축성공정’(築城工程)을 실시하도록 했고 그해 6월에 동닝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다. 10개의 요새중 대표적인 쉰산요새(勛山要塞)는 1937년말에 완공됐다. 둥닝요새는 중소 국경선에서 중국땅으로 2~5㎞ 안쪽에 있으며 해발고도 230~500m의 야트막한 산악에 지하땅굴을 거미줄처럼 파서 구축해 놓았다.

이들 지하요새는 3개씩 한묶음으로 지하에서 서로 통해있으며 언제든지 지상으로 병력을 출동할 수 있도록 수직통로가 뚫려있었다. 개별 요새의 규모는 4만-6만㎡로 아시아최대로 꼽힌다. 동닝요새는 병기공장 1개, 창고 400개, 육군 병원 4개, 발전소 1개, 야외포진지 45개, 군사비행장 10개 등 기본설비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었다. 철도 400여㎞, 군용도로 1957㎞가 요새와 연결돼 군수품을 보급했다.

당시 동녕지역 인구는 3만5천명에 불과했는데 동닝 요새의 일본군은 최대 13만여명에 달했다. 3개사단에 1개의 여단수비대와 2개의 국경수비연대로 구성됐다. 그중에서 제8사단이 수양진(綏陽鎭), 제12사단이 신청쯔거우(新城子溝), 제3사단은 완뤼거우(萬鹿溝), 132여단수비대는 싼차커우(山岔口)에 위치했다. 이들은 보병, 기병, 장갑병, 위생병, 부교병, 항공병, 포병, 수송병, 공병 등 완전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요새는 미궁처럼 서로 연결…박격포 공격에도 끄떡없는 강력한 철근콘크리트

쉰산요새(勛山要塞)에 들어서면 무력으로 세계영토를 점령하려는 일본의 야심이 그대로 느껴진다. 내부에는 거대한 철근콘크리트 땅굴이 미궁(迷宮)처럼 서로 열결돼 있다. 땅굴은 300㎜ 구경의 박격포 공격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쉰산 요새는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총면적이 5만㎡로 통로길이만 1163m이다. 지휘소 등 크고 작은 콘크리트 공간만 21곳이며 가장 큰 곳은 300㎡이다.

동굴은 높이 1.8m, 폭 1.5m로 사통팔달로 통한다. 경사로에는 포탄과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레일이 설치돼 있다. 통로 바닥에 배수구가 나 있다.

요새마다 상,중,하 3층으로 분리되도록 만들어졌으며 깊은 곳은 80여m까지 파 내려갔다. 지면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수직통로가 만들어져 은폐와 공격을 신속하게 하기 위한 구조로 설계됐다.

땅굴 통로의 교차 지점에는 지휘소, 의료소, 무선실, 사병숙소, 창고, 탄약고, 전기실, 화력발사지점, 방독가스 방지 이중 격리문 등 전투를 위한 용도에 따른 공간배치와 설비가 갖춰져있고 방문객들을 위해 각 지점이 표지판으로 표시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격전지…일본군 통신두절로 패망소식도 모르고 최후까지 항전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격전지였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9일 제25군, 제5군, 제17군이 중국 동부지역으로 일제히 출병했다. 소련은 중국과 함께 항일연합군대를 만들어 일본 관동군을 타격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군은 동닝요새전투에서 1500여명이 사망한 것을 포함해 8219명이 숨지고 2만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은 둥닝전투에서 170대의 공군 전투기가 폭격을 퍼부었으나 정찰정보가 정확하지 않고 중국지리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일본군들이 요새속에서 은폐방어전을 펼쳐 피해가 컸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영웅 페이얼소프 알렉산더가 탄생했다. 알렉산더 하사는 1943년 홍군에 참가했으며 당시 567보병단에 기관총 사수였다. 그는 1945년 8월 11일 둥닝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제일 먼저 용감히 적진에 뛰어들어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승리를 이끈 주역이 됐다. 그는 총탄이 다하자 온 몸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당시 20살이었다. 그는 1945년에 ‘소련전투영웅’ 칭호와 ‘레닌훈장’을 받았다. 둥닝요새 기념관 앞 광장에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전쟁은 8월30일 성훙산(勝洪山) 요새전투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개전한 지 22일만이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국왕이 공개적으로 항복선언을 했다. 그러나 이곳 요새에는 통신이 두절돼 일본군은 패망소식을 모른 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할 수 없이 소련군은 옌볜(延邊)에서 일본군 제3군참모장 고노사다오(河野貞夫) 중좌를 데려와 투항을 권유하면서 일본군들이 항복하게 되었다. 당시 남아있던 일본군 포로는 모두 800여명이었다.

김일성 북한 주석 둥닝요새 전투에서 부상…라오헤이산(老黑山)을 ‘장군봉’으로 명명

둥닝요새역사진열관(東寧要塞歷史陳列館)안에는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젊었을 때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에는 김 주석이 1948년 북한의 내각수상이 되었으며 1994년 사망 때까지의 약력이 기록되어 있다. 소개에 따르면 김일성 전 주석은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32년 봄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에 의해 안투(安圖)반일유격대에 파견되어 그 뒤 왕칭(汪淸)반일유격대대 정위원을 역임했다. 그 기간중 둥닝작전(東寧作戰)에 투입돼 작전중에 부주의로 부상을 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김 전주석은 이곳 비밀야영지에서 부상을 치료했는데 뒤에 사람들이 항일기지가 있던 라오헤이산(老黑山)을 ‘장군봉’(將軍峰)으로 부르고 있다고 적혀있다.

라오헤이산은 둥닝셴(東寧縣)에서 50㎞ 떨어진 곳에 있다. 일본군은 862부대, 121부대, 수비대, 육군병원과 비행장이 있었으며 1만여명이 주둔해 있었다. 이곳은 산이 높고 길이 험해서 캉롄(抗聯,동북항일연합군<東北抗日聯合軍>의 약칭)의 오랜 근거지였다. 김일성은 왕더린(王德林), 저우바오중(周保中), 쿵셴룽(孔憲榮) 등 중국 지도자들과 이곳에서 항일유격전을 벌였다. 그들은 신출귀몰했고 항상 일본군의 두통거리가 됐다고 중국 매체는 기록하고 있다.

중국인 노동자들 17만명 생지옥같은 생활…반항하면 늑대굴에 던져져 맹수들 먹잇감

지하 요새 공사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인 노동자 17만명이 동원됐다. 이들은 일본칼과 채찍의 위협 아래에서 하루 20여시간동안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렸다.

노동자들은 주로 전쟁포로가 많았다. 때로는 거리에서 강제로 잡혀온 사람도 있었다. 일본은 당시 노동자 모집광고 전단지를 통해 사람을 속여서 유인했다. 전단지에는 “돈을 벌고 싶으면 빨리 오라!”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에게는 매일 3위안을 줬는데 일단 요새에 들어오면 극소수만 살아나갈 수 있었다.

요새공사는 처음부터 극비속에 진행됐는데 노동자들은 일하는 기계로 혹사당하다 과로와 병으로 쓰러지거나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소련군이 공격하던 날 밤에 일본군은 3천여명의 중국 노동자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생매장을 했다. 그중 30여명이 간신히 도망쳐나와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병이 나서 노동력을 상실하면 살아있는 채로 흙구덩이에 던져넣어졌다. 이곳을 만인갱(萬人坑)이라 부르는 데 추운 바람속에 까마귀밥이 되어 죽어갔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날마다 병든 노동자들을 소달구지에 싣고 와서 이곳에 버렸다고 한다. 발굴된 유해중이 두 다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도망가다가 잡혀올 경우 일본헌병들이 여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칼로 다리를 잘라 구덩이에 던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나태하거나 반항하면 사정없이 채찍이 가해졌다. 또 강제노역에 반항하면 사나운 개와 늑대가 우글거리는 굴에 던져넣어 늑대밥이 되게 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바람만 겨우 막을 수 있는 간이 토담집에서 도토리가루 등 곰팡내나는 양식을 먹으면서 연명했다. 노동자들은 영하 30~40도가 되는 겨울의 혹한을 붙잡혀올 때 입은 옷 한벌로 견뎌냈는데 닳고 헤져서 기운 옷을 겨우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강제노역에 시달린 17만명의 노동자중 살아난 사람은 1천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발굴된 유골의 치아로 볼 때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다. 강제징용을 할 때 모두 30살이하만 징용대상이 되었다. 도착한 뒤 2~3년이면 혹독한 노동에 지치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음에 이르게됐다고 한다.

둥닝 요새에 들어가면 노동자들의 피에 맺힌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조선인 종군위안부, 성적 노예생활…공장 취직시켜준다며 속여 데려와 감금

둥닝요새에는 40개의 일본군 위안소가 산재해 있었으며 위안부수는 1천명에 가까웠다. 중국 언론의 당시 생존자들에 대한 취재 내용을 보면 최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위안부가 일본군의 성적노예란 표현에 대해 “사실과 큰 괴리가 있다”는 발언이 얼마나 뻔뻔한 거짓말인지 그대로 드러난다. 위안부들은 일본군의 강압아래 아무런 자유없이 인간이하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일본군이 쫓겨간 뒤에서야 탈출할 수 있었던 중국내 조선인 위안부들이 전하는 말은 충격적이다. 위안소에는 일본여성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조선 여성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군수가 13만명이었기 때문에 평균 한명의 위안부당 일본군 130여명의 비율이다. 중국 언론에는 위안부 한명당 하루에 최대로 일본군 20명을 상대한 것으로 돼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사병을 받은 뒤 3시 이후에 1시간 정도 쉴 수 있었고 그 다음에 또 병사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방직 공장 혹은 가무단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서 끌려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한번 발을 디디면 헌병대와 경찰대의 감시때문에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하루에 두끼의 수수밥이 나왔는데 그나마 부족했다. 반찬은 파를 소금에 찍어 먹는 경우가 많았다. 배가 고파서 무를 훔쳐먹다가 들켜서 맞기도 했다고 한다. 위안소는 일본인들이 운영했는데 하루에 8명 이상을 상대하지 않으면 구타당했으며 수수밥도 먹을 수 없었다. 도망가다가 잡히거나 화장을 하지 않으면 고추가루를 푼 물로 고문을 했다고 한다. 생리일에도 쉴 수 없었다. 일요일에도 휴식이 없었다. 위안부는 돈을 벌 수 없었다.

서러워도 주인 몰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울다가 들키면 어김없이 구타를 당했다. 울고싶으면 산으로 몰래 가서 울고 돌아와야했다. 눈물을 닦다가 눈물이 마르면 또다시 일본군에 시달렸다. 

쉰산요새에서 남쪽으로 4㎞떨어진 곳에 스먼즈(石門子)라는 곳에 4개의 위안소가 있었다. 이중 3곳은 조선부녀들이 있었는데 한 위안소에는 30~40명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연령은 가장 어릴 경우 17~18세였고 가장 많으면 25~26세였다고 한다.

병이 걸리면 치료를 하지 않고 밥을 주지도 않았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있는 수밖에 없었다. 괴로워서 죽는 경우도 많았다. 죽은 뒤에는 이불로 둘둘말아 바깥에 버렸다고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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