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의 원인을 찾아야 했나 봐요. 웹툰이 만만했나 봐요.”(작가 강풀)

“저도 애를 키우는 부모인데 웹툰이 이런 식의 취급을 받는 것이 너무 수치스럽고 분하다.”(작가 윤태호)

“웹툰과 만화가 굉장히 좋은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와중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다. 만화계 전체가 분노하고 있다.”(작가 주호민)

만화계가 들끓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최근 청소년 폭력의 원인으로 24개의 웹툰을 지목하고 이들 만화의 폭력성 검토에 착수해 유해매체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에 대한 통지를 받고 인기 웹툰 작가들이 강력 반발에 나섰다.

15일 저녁 목동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건물 앞에서 <순정만화>의 강풀, <이끼>의 윤태호, <신과 함께>의 주호민 작가는 웹툰 검열에 반대하는 침묵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지난 12일부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앞에서 인기 웹툰 작가 김수용씨를 시작으로 웹툰 작가들이 ‘웹툰 검열 반대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항상 마감과 밤샘작업에 시달리는 일상에도 불구, “자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웹툰 검열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자 잘 시간을 쪼개 먼 길을 달려왔다. 이날 함께 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던 <더 파이브>의 정연식 작가, <살인자○난감>의 꼬마비노마비 작가는 급한 일정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했다.


윤태호 작가는 “(유해매체로 지정한 웹툰이) 과연 정말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영향을 미치는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연구해야 한다”며 “그 연구를 토대로 해야지 이렇게 자의적으로 학교폭력의 원인으로 웹툰을 지목하고 검열하려는 조치는 황당하다”고 반발했다.

방송통신심의위의 유해매체물 지정 검토 대상인 24개 만화들에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주는 문화부장관상을 받은 정연식 작가의 <더 파이브>와 지난해 ‘오늘의 우리 만화 수상작’인 <살인자○난감>, 그리고 외국에 소개돼 주목받은 <옥수역 귀신> 등의 작품들도 포함돼 있다.

웹툰 검열이 작가들의 ‘자기 검열’을 초래하고 창작 활동을 심각하게 저해할 것이라는 점이 우려의 핵심이다. 주 작가는 “작가가 자기 검열을 하게 되고 큰 차원에서 보면 작품의 역량이 많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풀 작가 역시 “만화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표현을 많이 제약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 작가에 의하면 그냥 ‘19금’과 ‘유해매체 지정’은 다르다. 유해매체로 지정되면 홍보가 불가능하고 서점에서 매대에 진열될 수도 없다는 설명이다.


또한 방통위가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한 잣대가 다분히 표면적이며 주먹구구식이라는 지적이다. 윤 작가는 “성인 만화가 꼭 섹스와 폭력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양성이 함께 가는 것”이라며 “폭력이라는 소재의 표현도 과거처럼 원색적인 방식이 아니라 품위 있게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이런 일이 생기니 숨이 턱턱 막힌다”고 말했다.

주호민 작가는 “이종규 작가의 ‘전설의 주먹’의 경우, 폭력의 역사를 후회하고 반성하는 내용인데 그 과정에서 폭력 장면이 그려질 수밖에 없다”며 이 작품이 청소년유해매체 목록에 포함된 것에 대해 “방통위 측이 자기들 입맛에 맞게 지정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이미 작가와 연재처가 독자의 연령제한에 대해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3자인 방통위가 개입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윤 작가는 “어떤 웹툰이 ‘19금’을 달고 있으면 작가가 암묵적으로 청소년에 유해할 수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그건 (작가인)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만화의 비전문가인 당신들(방송통신심의위)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웹툰 작품이 게재되는 온라인 공간이라는 것이 ‘쌍방향성’을 갖기 때문에 독자와의 교감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작가들이 스스로 작품의 수위를 적정하게 조절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지지하기 위해 자리에 찾아온 MBC 김민식 노조부위원장은 “MBC에서 파업까지 하는 이유는 뉴스가 그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시청자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전에 임원진이 판단해서 뉴스를 검열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만화도 마찬가지다. 어린 친구들도 가치관과 판단 기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가 ‘방통위 사람들이 이걸 좋아할까 아닐까’를 고민하게 되면 안 된다”며 “작가는 자기가 쓰고 그리고 싶은 대로 표현하면 되고 독자들이 판단하면 된다. 그것을 심의 기구나 권력 기관이 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웹툰 작가들을 지지하기 위해 온 배기철씨는 “게임, 만화 같은 일부 문화를 표적으로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며 “(웹툰 작품들이) 비틀어서 세대를 얘기하는 건데 그것에 숨은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너무 표현만을 갖고 (문제 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작가로서 이렇게 1인 시위에 나선 것에 부담을 느끼진 않는가’라는 질문에 강풀 작가는 “만화가들 입장에서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파격적인 시도이다. 1인 시위도 처음”이라며 “매일 방구석에서 만화 그리는 사람들인데”라고 답하기도 했다.

윤 작가는 “이번 일로 많은 작가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며 “오늘처럼 개인적으로 시위하는 것은 물론이고 (방통심의위가 웹툰 검열을 결정한다면) 법적으로도 저항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한국만화가협회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학계와 변호사를 동원해 방통위가 하지 않은 자료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윤 작가는 “과연 웹툰이 학교 폭력에 영향을 미치는지 해외 사례까지 조사해서 밝힐 것”이라고 밝혔다.

성공회대 디지털콘텐츠학과에 재학 중인 송건태씨는 “해외에선 규제가 점점 풀려가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다”며 “이제 웹툰은 일상의 낙이 되면서 즐겨볼 수 있는 것인데 마치 마약, 술, 담배처럼 유해품 취급받는 것이 독자로서 불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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