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사장’이 내려온 MBC와 KBS 메인뉴스는 연성화되었으며 촌철살인의 클로징 멘트를 날리던 앵커나 비판적 목소리를 높이던 라디오 진행자, 시사프로그램 사회자들이 경질되었다. 그렇게 비판적인 언론인들은 문책성 전근, 징계 등의 방법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으로 핑계를 대기 전에 과연 언론인으로서의 양심과 직업적 신념을 가지고 뉴스 제작과 보도에 임했었는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뒤늦었지만) 파업은 그 바탕 위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의 감독작 <굿나잇 앤 굿럭>(2005)은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한 영화이다. TV뉴스쇼 진행자 에드워드 머로(데이빗 스트래던)와 조 매카시 상원의원의 TV대담을 소재로 하고 있다. 1950년 미 상원의원 조 매카시는 미국 국무성 내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화당의 지지를 바탕으로 1954년까지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이끌며 많은 정치가와 예술가, 언론인, 시민들을 공산주의자로 고발, 당시 미국을 침묵과 광기의 시기로 만들었다. 에드워드 머로는 모두가 침묵하고 공산주의자로 몰릴까 두려워하던 시기, “역사를 부정할 수는 있지만 책임은 피할 수 없다”라는 말과 함께 모두가 꺼리던 조 매카시와의 대결을 결심한다.
만들어진 지 7년이나 지난 영화가 현재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이유는 자명하다. 1950년대 그 누구 하나 반기를 들지 못하고 매카시의 말을 받아쓰기에 급급했던 언론들이나 ‘빨갱이’로 몰릴까 침묵과 자기검열의 수렁에 빠져있던 시민들, 그리고 ‘색출작업’이라는 이유로 사찰 등에 시달려야 했던 비판적 지식인들이 있던 미국의 그때와 지금 우리의 현재에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굿나잇 앤 굿럭>은 설사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가라는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함으로써 보편적 표현의 자유의 보장 측면에서는 한계를 노출한다. 그리고 머로의 모습이 미국영화에서 즐겨 나오는 영웅주의와 오버랩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목해야할 부분은 ‘태도’이다. 과연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매카시에게 대항하는 것이 가능할 까라는 그들의 고민은 가장 인간적임과 동시에 가장 비인간적인 고민이다. 그건 ‘바로’ 인간의 존재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생존 그 자체는 불가피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생존’일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가능하다.
머로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명백한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언론인이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국민의 편일 것이다. 머로와 그의 편집진이 고민했던 것은 누군가의 편이 아니라 과연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공익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언론은 (원했건 그렇지 않았던) 누구의 편이었을까. 뒤늦게나마 늦은 밤 광화문에 함께 모여 촛불을 든 그들에게. “굿 나잇 앤 굿 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