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KT가 종합편성채널에 투자를 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된 적 있었다. 종편을 지원하려는 정치권의 압박이 있었을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지만 KT의 공식 입장은 "투자할 가치가 있어서 했다"는 것이었다. KT 고위 관계자는 "그동안 IPTV 서비스를 하면서 지상파 방송사들이 콘텐츠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요구해서 곤란할 때가 많았다"면서 "종편에 투자를 한 건 장기적인 콘텐츠 확보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KT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IPTV 사업자들이 콘텐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IPTV 사업자들은 지상파 방송을 재송신하는 대가로 가입자 한 가구에 280원씩을 지상파 방송사들에 지급하고 있다. 유선방송 사업자(SO)들이 지난해 재송신 중단이라는 극단적인 사태를 겪으면서 절반 이하의 가격에 타결을 본 것과 대조된다. (정확한 단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100~150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KT가 MBC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의 화질을 낮춰줄 것을 요청해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가뜩이나 트래픽이 폭증하는 연말에 네트워크에 과부하가 걸릴 것을 우려한 KT가 MBC에 고화질 서비스를 일시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고 MBC가 이를 받아들였다. 방송사들 N스크린 서비스가 확산되면서 네트워크 투자가 급증하고 있는데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이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례에서 주목할 부분은 콘텐츠 유통 경로가 늘어나면서 콘텐츠의 가치가 치솟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데 팔리는 콘텐츠는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콘텐츠 수급 비용이 매출의 40%를 넘어가면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어렵다는 게 유료방송 시장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국내 유선방송 사업자(SO)들의 콘텐츠 수급 비용은 15% 미만인데 IPTV 사업자들은 매출의 대부분을 콘텐츠 이용료로 지불해 왔다.

KT가 자꾸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배경에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직접 동영상 서비스를 하겠다고 나서면서 KT는 콘텐츠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동시에 늘어난 트래픽 부담까지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가뜩이나 주력 사업이었던 음성통화 시장은 정체 상태고 성장 전략으로 추진했던 IPTV 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온갖 경쟁자들이 이 비좁은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올해부터 스마트TV 서비스가 본격화되면 콘텐츠 사업자와 플랫폼 사업자의 주도권 경쟁이 더욱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두남 한국방송광고공사 광고산업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콘텐츠 사업자들이 독자적인 통합 플랫폼 구축을 목표로 삼는 것과 달리 플랫폼 사업자들은 기존 유료 플랫폼의 스마트화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면서 "저가 경쟁 구도가 심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유선방송 가입비가 매우 낮다. 아날로그 방송은 월 6천~7천원 수준. 디지털 방송도 2만원이 안 된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미국에서는 유선방송 가입비가 100달러에 육박한다. SO들이 콘텐츠 경쟁력보다는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키워 채널 사업자(PP)들을 지배하면서 홈쇼핑 수수료나 인터넷 서비스 등의 부가 서비스에서 주요 매출을 올리고 있다. 유료방송 시장 자체가 매우 취약하다는 이야기다.

최근 LG전자는 KBS와 MBC 등과 콘텐츠 공급 계약을 체결하면서 이용자들에게 6개월 동안 주문형 비디오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대가로 10억원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미국에서 넷플릭스와 이용회수와 무관하게 첫 접속 때 5~10달러 수준의 수수료를 지불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워낙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인 데다 기존의 사업자들과 비교하면 파격적으로 낮은 가격이라 벌써부터 형평성 논란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스마트TV는 해외의 경우, 애플과 구글 같은 플랫폼 기반 사업자와 넷플릭스나 훌루 같은 콘텐츠 기반 사업자가 경쟁하는 구도다. 애플은 폐쇄형, 구글은 개방형이라는 차이가 있고 넷플릭스는 인터넷 서비스 중심, 훌루는 지상파 방송사 중심이라는 차이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단말기 사업자가 지상파와 케이블 채널 사업자(PP)들과 경쟁하는 구도다.

플랫폼 사업자들은 이용자들을 플랫폼에 계속 묶어두려고 하고 콘텐츠 사업자들은 N스크린 전략으로 플랫폼을 확대하려고 한다. 단말기 사업자들은 단말기 구매 고객을 콘텐츠 소비자로 전환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어느 쪽이든 서로의 시장을 잠식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경쟁 구도다. 이 과정에서 콘텐츠와 플랫폼을 모두 장악하고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는 사업자가 스마트TV 시대의 주도권을 잡게 될 거라는 게 정 연구원의 결론이다.

최근 지상파와 케이블, 위성방송, 통신회사들 사이의 재송신 분쟁이나 통신과 지상파, 포털의 망 중립성 논쟁은 첨예한 생존 경쟁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 연구원은 "우리나라는 고가의 일체형 단말기 기반의 가전회사들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어 시장 확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픈 플랫폼 기반의 콘텐츠 수급 방식이 콘텐츠 가치 하락과 시장 잠식을 우려하는 콘텐츠 사업자들의 협업을 끌어내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 연구원은 "스마트TV의 수익모델은 콘텐츠 판매과 광고의 두 축으로 갈 텐데 유료 모델의 경우 저가 결합상품이 확산되면서 틈새시장을 구축하기가 쉽지 않고 무료 모델의 경우에도 글로벌 사업자들의 독점화 경향이 TV 시장으로 옮겨오면서 경쟁이 격화돼 신규 시장 창출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사업자들 사이의 수익과 비용 배분 합의, 그리고 정부의 조정자적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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