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1. 식민지시대편
① 민간지 창간
② 민간지 경영 난맥상
친일이 아니면 존립이 어려웠던 초기 민간지들의 굴절된 모습은 점차 광고 및 판매의 체계적인 전략 도입을 통해 기업의 꼴을 갖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문의 비판적 논조는 엷어져 갔으며 결국은 식민주의 황색저널리즘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지난 1925년 10월, 조선일보는 박헌영 임원근 등 기자 17명을 집단 해고했다. 회사측은 이들의 해고에 대해 “재정형편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속사정은 전혀 달랐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신일용기자가 쓴 사설내용이 반일감정을 담고 있다며 이를 문제삼아 9월8일 정간조치를 내렸는데 회사측이 정간조치를 풀기위해 기자들을 제물로 삼은 것이다.

해고 조치가 있자 총독부는 바로 정간조치를 해제했다. 반일기자들을 제거해야겠다는 총독부의 의중과 신문사를 살려야겠다는 조선일보 사측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렇듯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창간 이후 3번째 강제 정간으로 인한 경영위기를 기자의 집단 해고를 통해 해결했다.

당시 민간지 경영의 난맥상과 총독부에 대한 눈치보기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사례다. 조선 총독부의 통치 방식의 하나로 창간된 민간지들은 자본 부족과 신문 경영 미숙 등으로 늘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조선일보가 기자 집단해고라는 극약처방을 쓴 이면에는 총독부의 눈총을 받아온 좌익계열의 기자들을 제거해 불편한 관계를 개선해 보자는 의도와 함께 경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조선일보는 친일자본에 의해 설립됐지만 진보 좌익계열의 기자들이 많이 포진, 기사문제로 종종 총독부와 마찰을 빚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일보의 판권이동 과정을 살펴보면 조금 더 쉽게 이해된다. 창간당시 친일적 대지주와 예속자본가들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예종석, 송병준 등 36명의 발기인이 20만원(당시 쌀한가마 가격은 5원정도)을 출자키로 했으나 실제불입금은 5만원에 불과했으며 경영부진으로 최강, 유문환, 권병하를 거쳐 21년 판권이 매국5적의 하나인 송병준에게 넘어갔다. 그러다 다시 24년 신석우가 송병준으로부터 8만5천원에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이같은 잦은 판권 이동은 주로 신문 경영의 부실에 원인이 있었다.

같은 시기에 창간됐던 동아일보나 폐간된 시사신문의 뒤를 이어 창간된 시대일보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는 아니었다. 동아일보는 김성수가 처음부터 주식회사 형태를 도입, 총 자본금 1백만원을 공모하려 했으나 잘되지 않아 10만원여의 자본만으로 출발했으며 이 마저도 창간 두달여만에 자본금이 바닥나 김성수의 토지를 담보로 8만원을 융자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 이후에도 사옥신축 등으로 경영난에 봉착했던 동아일보는 29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본금 35만원의 안정된 구조를 갖게 된다. 동아일보가 이처럼 자본금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은 고리의 사채대출 사업을 통해 축적한 지주자본의 영입, 그리고 계열사인 경성방직에 대한 총독부의 지원 때문이었다.

24년 최남선에 의해 창간된 시대일보도 창간 자본금을 40만원으로 잡았으나 약간의 창간비용만 마련됐을 뿐 초기부터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다 종교단체인 보천교에 판권이 넘어갈뻔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결국 홍명희사장 재임시 재정난으로 26년 문을 닫고 말았다.

이어 동아일보 출신 이상협에 의해 26년 창간된 중외일보도 한국신문 사상 처음으로 8면 증면을 단행하는 등 혁신적인 경영방침을 선보였으나 운영난으로 30년 자진휴간해 버렸고, 총독의 양아들이라 비난받던 노정일이 이를 인수, 중앙일보로 개칭해 속간했으나 또다시 재정난과 인쇄직공 파업으로 5개월만에 휴간하는 등 극심한 부침을 보였다. 이후 중앙일보는 32년 최선익 등이 인수, 이듬해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바꾸는 한편 여운형을 사장에 영입, 체계를 정비했으나 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된다.

이처럼 민간지들이 재정난에 시달리는 한편 판권이동이 심했던 까닭은 무엇보다 총독부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신문 창간, 높은 문맹률과 협소한 광고 시장으로 인한 신문 시장의 미성숙, 그리고 신문을 사적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로 본 발행 주체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판권의 잦은 이동과 함께 총독부와의 결탁을 가능케 하는 원초적 조건으로 기능했다. 또 애초 총독부가 3개의 민간지만을 허가, 판권이 하나의 이권으로 변모하면서 잦은 판권이동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경영상의 난맥으로 몇몇 민간지들은 문을 닫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과정에서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일부 민간지들의 창·폐간속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 양태는 같지 않지만 굳이 공통점을 살펴보자면 두 신문 모두 총독부와의 거래 내지 비호속에서 생존을 영위했다는 사실이다. 기자 해고를 통해 총독부로부터 생존을 약속받은 조선일보나 경성방직에 대한 총독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자본증식을 해온 동아일보 모두 총독부의 그늘에서 커 온 것이다.

친일이 아니면 존립이 어려웠던 초기 민간지들의 굴절된 모습은 점차 광고 및 판매의 체계적인 전략 도입을 통해 기업의 꼴을 갖추게 됐다. 이 과정에서 신문의 비판적 논조는 엷어져 갔으며 결국은 식민주의 황색저널리즘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신문자본 연구팀이 당시에 민간지는 있어도 민족지는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도 그같은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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